[병원신문=정윤식 기자]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6월 9일 저녁, 임기 만료를 정확히 한 달 앞두고 기습적인 사표를 제출해 의료계에 충격을 줬다.
중도 퇴임의 가능성 자체는 거론되긴 했으나, 보통의 보건의료 기관장들이 정권 교체 여부와 상관없이 임기를 끝까지 마친 사례가 많고(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사례 등), 게다가 임기 만료 직전에 갑자기 사의를 표명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기석 이사장의 지난 시간은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1만5,0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거대 공공기관의 수장으로서 감당해야 할 압박감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취임 직전 발생한 대규모 횡령 사건의 수습부터 노조와의 갈등, 건강보험 재정 관리, 담배 소송, 적정진료 추진, 건보공단 직원들의 기강 확립, 본원(원주) 근무 기피 현상 해결 등 무거운 과제까지 어깨를 짓누르는 현안이 산적해 있었다.
그가 짊어졌던 깊은 고뇌와 수고스러움 자체를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개인의 고민과 고충을 십분 이해하더라도 그가 보여준 그간 행보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임기 만료를 정확히 한 달 앞둔 시점에서의 갑작스러운 사표 제출은 그간의 노력을 훼손하는 것은 물론, 기관장의 막중한 무게를 스스로 저버린 무책임한 결정이다.
사의 표명의 타이밍은 여러모로 납득하기 어렵다.
정 이사장은 6월 9일 야간에 보건복지부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이어서 사표 수리까지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긴 하나, 어쨌든 바로 다음 날은 2027년도 요양급여비용 계약 체결식이 예정된 날이었다.
의료계 최대 현안 중 하나인 수가협상을 마무리 짓는 주요 행사 직전에 조용히 사직서를 던진 셈이다.
체결식 당일, 그는 건보공단 이사장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현행 수가 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는 발언을 이어갔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수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조직 내부가 겪는 혼란은 더욱 심각하다.
현재 건보공단은 급여상임이사와 징수상임이사를 비롯한 주요 상임이사들의 공모가 진행 중이거나 여전히 공석인 상태로, 임원진의 빈자리가 크다.
무엇보다 당장 7월 1일 자로 예정된 대규모 정기 승진 인사와 인사이동을 코앞에 두고 있다.
조직의 명운을 가를 중요한 인사 시기를 앞두고 최고 인사권자가 짐을 싼 것은 1만5,000여 명의 조직원들을 표류하게 만드는 안일한 처사다.
사퇴 과정에서 드러난 불통은 정 이사장이 평소 입버릇처럼 강조하던 ‘소통과 배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건보공단 내부 직원들은 이사장의 사의 표명 사실을 공식 발표가 아닌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됐다.
물론, 임직원들에게 미리 알릴 의무는 없고 그럴 기분도 들지 않았을 것이 당연하겠지만 자신과 3년을 함께 일한 직원들에게 최소한의 작별 인사나 설명조차 없이 야간에 기습적으로 사표를 제출한 것이다.
사실 정 이사장을 향한 내부 평가는 임기 내내 그리 후하지 않았다.
노조와의 갈등은 차기 이사장 임원추천위원회 구성 과정까지 이어졌고, 내부 기강 문제나 소통 부재에 대한 지적은 끊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 사퇴를 두고 건보공단 내부에서 아쉬움이나 서운함을 표하는 목소리는 찾기 힘든 모양새다.
오히려 퇴장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준 일방적인 소통 방식과 뜬금없는 타이밍에 대한 실망감만 감지된다.
어떤 사정이 있었든 대한민국 보건의료의 중추를 담당하는 공공기관의 수장이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는 선례를 남긴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기관장의 무책임한 퇴장은 결국 정책 추진의 동력 상실로 이어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과 의료계의 몫으로 남는다.
6월 11일을 기점으로 차기 건보공단 이사장 공모가 마감됐다.
조만간 새로운 수장이 임명되겠지만, 이번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차기 이사장은 단순히 스펙이나 정치적 셈법에 의해 자리만 채우는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
텅 빈 임원진의 공백을 메우고, 흔들리는 내부 기강을 다잡으며, 외부의 굵직한 보건의료 현안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묵직한 리더십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자신이 맡은 자리의 무게를 인지하고, 임기 마지막 날까지 국민과 조직원 앞에서 책임을 다하는 인물이 임명돼야 한다.
더 이상 건보공단이 수장의 이해하기 힘든 처신으로 인해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 않다.
기관장의 말하지 못할 사정과 고뇌, 고통이 어떻든 간에 타인이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사람은 타인의 깊은 마음속과 생각을 알 수 없기에 그것 또한 개인 사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기석 이사장이 남긴 'NHIS-CAMP', 디지털 대전환 등의 주요 업적들이 건보공단 역사 속 기록으로 남는 것은 이번 일과 별개가 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