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에도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올해 초부터 갑자기 답장이 없어진 건보공단에 문자를 보낸다.
“건보공단아, 자니? 자? 잘 지내니?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연락했어. 밥은 먹고 다녀?”
하지만 여전히 답장은 없을 것 같다.
너무 답장이 없어서 이제는 걱정이 된다.
대한민국 오천만 건강지킴이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이사장 정기석)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의료계에서 건보공단이 행방불명됐다.
건보공단은 국민건강보험의 보험자인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으로, 4대 보험의 수납을 주 업무로 삼고 있다.
이 외에도 건보공단은 건강보험 서비스를 통한 국민 의료비 절감, 건강관리 및 질병 예방, 각종 검진 및 접종 관리, 건강보험 관련 정책 연구 및 제안 등 국민의 삶의 질과 밀접한 업무를 다수 맡고 있다.
이는 건보공단이 대한민국 공공기관 전체에서 직원 수가 한국철도공사, 한국전력공사 다음으로 많은 1만5천여 명으로 3위(무기계약직 1천여 명 포함)에 올라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담당 업무의 성격이 많이 다르긴 하나 건강보험과 관련된 또 다른 공공기관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직원 수가 4천여 명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매우 축복받은(?) 조직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건보공단이 건강보험 및 노인장기요양보험 정책 제도 등을 설계하고 추진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카운터파트가 의료계라는 점이다.
아무리 의료계가 건보공단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고 건보공단도 의료계를 상대할 때 곤란한 일을 겪을 때가 있다곤 하나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사이다.
둘의 사이는 하루 이틀 인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보공단과 의료계 대표 단체들끼리 일이 생길 때마다 지속해서 서로 공문을 주고받으며 업무 협조 등을 구하고 있지만, 일선에 있는 의료인들은 언론을 통해서 건보공단의 사업과 정책 방향을 읽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건보공단이 언론에서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그 존재감이 굉장히 미미해졌다.
그나마 있는 존재감도 대국민 의료 서비스 및 의료계에 중요한 사업 및 정책과 관련된 것이 아닌 일종의 ‘가십’에 가깝다.
실제로 2024년 6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인 ‘빅카인즈(BIGKinds)’에 건보공단을 검색해 봤다.
빅카인즈는 조선일보·국민일보·한겨레 등의 중앙지와 매일경제·서울경제 등과 같은 경제지, KBS·MBC 등의 방송사와 지역종합지 및 전문지 등의 뉴스를 모두 수집한다.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분석 뉴스 내에서 의미적 유사도가 높은 키워드 순에 따라 가중치와 빈도수를 부여해 데이터 유형을 집계하며 워드클라우드 형태의 이미지와 막대그래프로 결과치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우선 2022년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46억 원 횡령 사건과 관련된 검색어인 △최씨(가중치 32.79) △재판부(23.02) △필리핀(22.15) △금융당국(20.14) △부장판사(16.88) △계좌 압류(16.00) △민사소송(15.33) △ 경찰청(13.16) 등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건보공단의 고유 업무와 관련된 단어라고 보기에는 거리가 아득히 멀다.
그나마 부당이득 환수 처분(8.57), 보건복지부(8.43), 윤석열 대통령(8.31), 피부양자(6.39), 요양급여(6.39), 노인학대 예방(5.48) 등이 수집됐으나 가중치는 그리 높지 않다.
검색 기간을 1~5월로 변경해도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은 요양기관 본인 확인제도와 관련된 신분증, 주민등록번호, 운전면허증, 여권, 담배소송 등의 단어와 정기석 이사장이 취임때 부터 강조한 현명한 선택 정도만 검색될 뿐 오히려 46억 원 횡령 연관 단어인 △가상화폐 △역대 최대 규모 △재정관리팀장이 더 많이 노출됐다.
다 떠나서 건보공단이 국민들을 위해 맡고 있는 엄청난 양의 중요한 업무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연관어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현재 건보공단 임직원들은 46억 원 횡령 사건의 ‘히읗(ㅎ)’만 들어도, 숫자 ‘46’만 보여도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정말 눈에 띄는 건보공단 소식이 없다.
없으니까 매번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은 ‘46억 원 횡령’과 ‘내연녀’만 주목받는 것이다.
최근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얘기가 흔하게 들린다.
“요즘 건보공단 도대체 뭐해?”
물론 건보공단의 업무 중 상당수가 공개하기 어렵거나 외부로 티가 나는 일이 아니라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보공단은 그간 언론을 통해 자신들의 사업과 정책을 홍보했고, 때로는 국민과 의료계의 양해를 구했으며, 어떨 때는 국민과 의료계의 오해를 풀었다.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지난 10여 년 동안 건보공단이 매달 한 번 이상씩 보건의료전문지 기자들과 가진 정기적인 간담회였다.
연초 건보공단 이사장으로 시작해 기획상임이사, 급여상임이사, 징수상임이사, 총무상임이사, 장기요양상임이사, 건강보험연구원장 등 임원을 거쳐 각 실무부서와의 간담회로 1년을 보내고 나면 건보공단의 사업 전반에 대한 기자들의 이해도와 의료계와의 스킨십이 대폭 상승되는 효과를 보였다.
그런 보건의료전문지 간담회가 올해는 정기석 이사장 신년 기자간담회의 갑작스러운 취소 이후로 감감무소식이다.
게다가 10월은 국정감사, 11월과 12월은 연말 분위기 탓에 '감감무소식'은 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코로나19 때부터 급격히 위축된 건보공단의 대언론 활동은 여전히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 심해졌다.
그렇다고 건보공단이 간담회를 추진하지 못하는 대신에 ‘언론과 적극적인 스킨십을 지속하려 노력했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답하긴 힘들 듯 하다.
언론의 관심을 애당초 받지 않아야 귀찮은 일이 발생하지 않고 편해진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공공기관 전체 직원 수 3위에 빛나는 건보공단과 같은 거대 공공기관이 언론의 관심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일뿐더러 무척 이기적인 생각이다.
되려 건보공단이 적극적으로 언론과의 거리를 좁히지 않으면 가십거리 수준에 불과한 뉴스들만 판치고, 건보공단 블라인드에서는 '우리 건보공단 왜 이래? 건강보험 재정 괜찮아?'라는 자조 섞인 외침 또는 '누구랑 누구랑 사내커플이래!'라는 등의 의미없는 허상만 공허하게 멤돌뿐이다.
뭐,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할수 없다.
원래 ‘악플(악성댓글)’ 보다 더 슬픈 게 ‘무플(댓글 없음)’이다.
정기석 이사장의 슬로건 중 하나인 ‘소통과 배려’가 건보공단 내부에서는 얼마나 잘 정착했는지 몰라도 대언론 활동에서는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긴 힘들 것 같다.
이는 비단 건보공단에서 언론을 담당하는 부서만의 문제는 절대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다.
의대정원 증원이라는 굵직한 이슈가 현재 진행형인 점을 백번 양보한다 해도 지금처럼 건보공단 실무부서와의 발전적인 의견 교환과 스킨십이 원활하지 않다면 언론을 담당하는 부서의 존재 이유는 없기 때문에 말이다.
과거처럼 건보공단이 건강보험 관련 공공기관으로서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아직 유지하고 있고 의료계 카운터파트로서 제 역할을 잘하고 있다는 얘기를 건보공단 임직원들끼리만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다.
밖에서 모르면 전혀 의미없다. 그저 우물 안의 일일 뿐이다.
필자는 올해 1월 16일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선택은 다르지만 의도는 같다’라는 제목의 기자수첩에서 정기석 이사장과 강중구 원장 취임 2년 차인 만큼 양 기관의 대언론 활동이 성장하길 바란다는 마음을 담아 각각의 홍보실 조직변화를 언급한 바 있다.
8개월가량이 지난 후에 보니까 심평원은 모르겠고 적어도 건보공단은 홍보실만 언급해서 될 문제는 아니었던 듯 싶다.
필자가 볼수 없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면 그나마 건보공단의 입장을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결국, 중요한것은 의지다.
지금 건보공단의 의지는 어디에 있는가?
비보도를 전제로 한 차(tea) 간담회나 간혹 있는 기자들과의 점심·저녁 식사 자리가 건보공단의 다양한 사업과 정책을 두루 아울러 정확한 정보와 소식을 국민과 의료계에 전달하는 공식 간담회를 절대 대체할 수 없다.
“건보공단아, 잘... 지내지? 나 조금 취했는데, 너 행복하지? 난 알아. 어차피 답장 없을거. 그래도 너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