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1번가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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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1번가의 기적
  • 윤종원
  • 승인 2007.01.30 0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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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짓 짐작했던 바가 기분 좋게 깨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기회다.

윤제균 감독과 임창정-하지원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선입견을 갖기 십상이다. 이들의 이름에서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이었음에도 전국 관객 420만 명을 불러모은 본격적인 섹스코미디 영화 "색즉시공"이 퍼뜩 떠오르지만 "1번가의 기적"(제작 두사부필름)은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웃음을 주는 영화에 그치지 않았다.

영화에는 세 사람이 4년이 넘는 세월을 보낸 흔적이 담겨 있다. 윤제균 감독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유성협 작가와 만나 가슴 울컥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쉽게 표현한다면 유성협 작가의 섬세한 필체에 윤제균식 웃음이 만났다고 생각하면 된다.

재개발로 인해 곧 사라져야 하는 달동네를 배경으로 마냥 코미디만 나올 수는 없는 일. 웃음이라는 친근한 무기로 어느 영화보다 가난한 이의 아픔을 쓰라리게, 가난한 이의 꿈을 아리게 표현해냈다. "색즉시공"에서 화제가 됐던 구토 장면이 딱 한번 등장하는 순간까지는 영화의 방향성을 의심하지만 이후 윤 감독은 그건 관객을 향한 트릭이었을 뿐이라고 외친다.

이야기는 세 축으로 진행된다. 재개발 지역에서 안나가겠다고 버티는 달동네 주민을 "쓸어버리기" 위해 1번가를 찾아온 날건달 필제(임창정 분), 동양챔피언이었으나 지금은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아버지를 둔 여자 복서 명란(하지원), 그리고 달동네의 현실을 때론 행복하게,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비참하게 표현해내는 어린 일동(박창익)ㆍ이순(박유선) 남매.

미리 말하자면 관객은 필제와 명란의 삶보다는 일동과 이순의 고단하지만 천진난만한 모습에 더 이끌릴 것이다. 극장을 나오면서 연기 잘하는 임창정과 하지원에 결코 밀리지 않는 어린 배우들에게 감탄의 박수를 보내게 된다.

세 축은 1번가를 배경으로 "따로 또 같이" 움직인다. 각각의 이야기를 오롯이 전하면서도 한데 어울려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편집과 음악의 힘이다. 마치 영화는 편집의 예술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수없이 시도되는 교차편집을 통해 인물의 감정선을 또렷하게 만든다. 감정이 과잉상태에 접어들 즈음 빠르게 전환하는 화면과 함께 귀로 먼저 변화를 알리는 이병우 감독의 음악은 강요하지 않고 1번가의 아픔에 동참하게 한다.

재개발이 확정됐으나 나가지않고 버티는 1번가 30여 가구의 동의서를 받기 위해 파견된 건달 필제는 한심한 동네 수준에 툴툴거린다. 지구수비대와 우주방위군을 자처하는 일동-이순 남매, 하늘을 난다며 지붕 위에서 숱하게 떨어지는 덕구, 1번가 수준에 맞지 않게 고운 옷을 차려입고 다단계 판매회사에 다니면서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려 하는 선주(강예원). 거기에 5전1무4패의 기록을 갖고 있으면서도 당돌하게 동양챔피언을 꿈꾸는 여자 복서 명란까지.

마을을 밀어버리기 위해 온 필제는 어느 순간 아이들에게 영웅이 돼 있다. "KBS 9시뉴스 기자"라는 거짓 전화로 수돗물을 끌어오고, 인터넷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

명란은 동양챔피언이었던 아버지를 이어 복싱을 한다. 낮에는 주류판매처에서 일하면서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챔피언 방어전을 치르고 난 뒤 몸을 가누지 못한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자신이라는 죄책감은 맞아도 아프지 않은 감각을 갖게 한다.

필제는 거칠게 대항하는 마을 주민들을 말로만 겁줄 뿐, 실제 행동은 하지 못한다. 되레 아이들을 보살피고, 명란의 허무맹랑한 꿈을 지켜보는 마을의 관조자가 돼간다.

공장이 싫어 다단계 판매회사에서 허황된 꿈을 꾸는 선주에게는 자판기를 운영하는 태석(이훈)이 다가온다.

일동ㆍ이순 남매는 도망간 엄마를 대신해 보살펴주는 할아버지가 암에 걸리자 암에 좋다는 토마토를 구하기 위해 방울토마토를 심는다. "거지"라고 놀리는 학교 친구들에게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친구들이 형을 동원해 괴롭히는 데는 피할 재간이 없다. 이 두 어린아이들이 편견에 가득찬 형들이 던지는 빨간 토마토에 맞는 장면은 내내 가슴에 남는다. 가진 자의 폭거와 꿈틀댈 수조차 없는 약자의 설움, 폭력에 당했음에도 훌훌 털어버려야 하는 현실이 이어진다.

정겹지만 불안함이 공존했던 이들의 삶은 진짜 철거깡패들이 들이닥치면서 파국으로 향한다. 또한 동양챔피언에게 도전한 명란은 링 위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캐릭터 하나하나, 이를 연기한 배우 한 명 한 명 기억에 남는다. 영화가 주연과 조연의 고른 호연과 더불어 주연이 아닌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 있을 때 꽉 찬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적절한 균형감과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해오던 영화는 현실인지 바람인지 모를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중심을 잃는다. 뒤로 갈수록 느린 속도로 할 이야기를 분명히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서둘러 결말을 지어 끝내버린 인상. 비록 그게 마음 속의 기적일지 모르지만 현실에 단단히 뿌리내렸던 이야기를 판타지로 돌려버린 듯한 마무리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15세 이상 관람가. 2월15일 개봉.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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