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라디오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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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라디오스타
  • 윤종원
  • 승인 2006.09.0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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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있어도 눈물 나는, 라디오스타

영화가 끝나고 난 후 불이 켜진 극장. 관객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붉게 충혈된 눈. 그러나 웃고 있다.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이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안성기와 박중훈이라는, 한국 영화계의 소중한 보물을 이처럼 소중하게 다룬 작품이 근래 있었던가. 우리네 평범한 삶을 어떠한 과장 없이 이처럼 솔직하게 표현한 작품이 또 있었나.

올해로 연기 인생 50년을 맞는 안성기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다. 안성기는 스스로 자신에게 큰 상을 내렸다. 안성기와 더불어 20년이 넘는 연기 생활을 함께 해온 박중훈 역시 안성기 앞에서만큼은 늘 귀여운 동생이면서도, 그 자신 어떻게 배우로서 살아왔는지 보여준다.

영화가 공개되기도 전부터 영화계의 큰 관심을 모았던 작품 "라디오스타"(제작 영화사 아침씨네월드)는 "왕의 남자"가 이준익 감독의 가치관과 인간관, 그리고 연출력으로 태어난 작품이었다는 걸 새삼 증명할 만큼 인간적이면서 기술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연출력으로 관객을 웃고 울린다.

"안성기와 박중훈이라는, 젊은이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의 보물이 "왕의 남자"로 이들보다 (젊은이들에게는) 더 알려진 이준익 감독을 통해 그 빛을 발하기를 기대한다"는 한 영화인의 바람은 다행히 바람으로 그치지 않았다.

먹먹해진 가슴으로 시사회장을 빠져 나온 한 관객은 "한국 영화계에 또 하나의 축복이 내렸다"고까지 말했다.

◇감독 이준익의 힘
어찌 보면 빤한 영화다. 88년 가수왕 출신의 퇴락한 가수와 그의 매니저. 2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해 온 이들이 이제야 비로소 마주보며 서로를 들여다본다. 뻔한 갈등과 뻔한 화해가 예상되지 않는가. 그런데 영화는 결코 뻔하지 않다. 그들과 함께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코끝이 붉어지도록 눈물을 흘린다. 이건 분명 이준익 감독의 힘이다.

영화는 곳곳에서 이준익 감독의 힘을 만날 수 있다. 물론 "황산벌" "왕의 남자"에서 좋은 글을 쓴 최석환 작가가 발품 들여 깔끔하게 세공한 공 역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차분히 정리된 이야기에 펄떡펄떡 살아 있는 생동감과 따뜻한 인간미를 덧칠한 이는 감독이다.

조용한 소도시 영월을 배경으로 감독은 참 많은 것을 짚어낸다. 영화 사이사이 등장하는 자연과 자연 속 인간은 은근히 하나가 돼 있다. 비록 도시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농촌사회의 정감이 남아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잃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말없이 보여준다.

"왕의 남자"가 권력을 권력자가 아닌 민초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처럼 "라디오스타"는 평범한 우리네들의 삶을 정감 있게 들여다보며 가장 소중한 것은 결국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는 주제를 분명히 드러낸다.

이 감독은 현재의 시간과 공간을 다뤘음에도 관객의 마음을 현재와 전혀 다른 세상으로 안내하는가 하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사실적 표현으로 관객의 눈을 붙들어둔다. 집중력을 높이면서도 정점을 굳이 정점이라고 소리치지 않는 편집 솜씨 역시 연출력의 하나일 것.

그의 가장 큰 미덕은 편안함과 따뜻함이다. 그의 영화에는 결코 천성이 나쁜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머리 아플 정도로 "영화적"임을 내세우는 과장된 표현 방식을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아 가슴 졸이지 않고 편하게 화면에 빠져들 수 있다.

◇안성기&박중훈
시사회 무대 인사에서 안성기는 "주위에서 연기 인생 50년, 50년 하는데 쑥스럽다. 딱히 그걸 기념하려고 만든 작품은 아니지만 정말 행복하게 촬영한 영화"라고 말했다. 늘 안성기와 함께 해온 박중훈도 "행복하게, 기쁘게 만든 영화"라고 입을 모았다.

두 사람에게 자랑스러운 영화가 됐다. 또 "라디오스타" 역시 두 배우 외에는 "철없는 록가수" 최곤과 "속깊은 매니저" 박민수를 맡기지 못했을 것이다.

1988년 "칠수와 만수"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친형제 못지 않은 우의를 다져왔고, 이후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을 통해 콤비를 이뤘다. 7년 만에 다시 한 영화에 출연한 두 배우는 박중훈이 농담삼아 "우리 이 영화로 발딱 일어서야 한다. 형은 아예 병상에 누워 있었다"고 말할 만큼 화려한 시절을 뒤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존재감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저력을 드러낼, 내공을 펼쳐 보일 작품을 못 만났던 탓이다.

안성기는 최곤에게 담배불을 켜주고, 자장면을 비벼주며, 비위를 맞추는 박민수가 됐다. 그의 작품은 늘 특별했던 시기를 지나 젊은 후배들을 앞에 세우고 자신은 뒤로 빠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그가 사실은 얼마나 특출난 배우인지 잊고 있었음을 반성하게 한다. 페이소스가 진하게 묻어나는 그의 얼굴에서 보이는 환한 웃음을 통해 믿음과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박중훈은 또 어떤가. 인기의 영광을 버리지 못해 이제는 폭행이나 일삼고 투정이나 부리는 최곤이 결코 밉지 않은 것은 박중훈 때문이다. 한때 톱스타의 인기를 누려봤던 배우이기에 최곤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을까. 시종 건들거리는 듯한, 그래서 쉬워보였을 법한 박중훈의 연기는 마지막 단 한 장면을 위해 일부러 설정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귀가 딱 맞아떨어진다.

단 한 번도 스러진 적이 없었음에도 "라디오스타"를 통해 보는 두 배우의 "재기"가 반갑다. "라디오스타"는 두 배우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옛 것이 된 줄 알았던 라디오가 여전히 친숙하게 우리 곁에 있듯 젊은 후배들에게 그들의 옛 자리를 내준 안성기와 박중훈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었음을 발견한다. 고맙게도.

◇철없는 록가수와 속 깊은 매니저
1988년 가수왕 최곤(박중훈 분). 그러나 지금은 미사리 카페에서 술에 절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퇴락한 가수다. 그의 곁에는 영광과 쇠락을 함께 한 매니저 박민수(안성기)가 있다. 폭행으로 유치장 신세가 된 최곤을 빼내기 위해 민수는 방송국 국장의 권유대로 최곤의 등을 떼밀어 지국 폐쇄를 앞둔 영월 방송국으로 내려간다. 강석영 PD(최정윤)는 방송 사고를 내고 원주방송국에서 좌천된다.

"내가 영월에 가면, 영월 사람들이 일이나 제대로 하겠냐고~"라며 투덜거리는 최곤은 생방송 중 후배 가수(우정출연 김장훈)와 욕설을 하며 싸운다. 민수는 이런 최곤을 어르고 달래며 지금껏 피 말리는 날들을 이어왔다.

DJ에 뜻이 없는 최곤은 터미널 앞 청록다방 김양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김양은 외상값을 갚으라는 주문에 이어 엄마를 향해 절절한 사과를 한다. 그날 이후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은 영월 주민들의 상담소이자 놀이터가 된다. 할머니들은 고스톱을 치다가 "막판 싹쓸이"가 있는지 물어보는 전화를 하고, 꽃집 노총각은 사랑 고백을 한다.

영월의 유일한 록밴드 이스트리버는 최곤을 위해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고 인터넷을 통해 이 방송은 인기 프로그램이 된다. 100회 특집 공개방송에서 이스트리버는 신나게 노래를 부르지만, 최곤은 "노래 부르고 싶을까봐" 끝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이 방송을 보러온 서울의 방송국 국장과 대형 음반기획사 사장. 두 사람에 의해 박민수는 피치 못할 선택을 해야 한다.

라디오를 통해 들리는 귀에 익은 노래들, 순박한 영월 사람들, 사람들만큼이나 소박한 영월의 풍경. 이 모든 것들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옛 것을 통하지 않고도 향수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다.

안성기와 박중훈 외에도 모든 배우들이 충분히 제 역할을 해줬다. 다들 칭찬할 만한 연기를 했지만 그중에서도 최곤 보다도 더 철없는 록밴드 이스트리버로 출연한 노브레인은 영화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또 다방 레지 김양은 영화의 중요한 고비를 맞는 지점에서 제대로 연기를 해냈다. 김양 역은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삼순이로부터 훈련을 받았던 인혜 역의 한여운이다.

28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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