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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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괴물
  • 윤종원
  • 승인 2006.07.0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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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로 시작해 소시민 가족의 위대함 드러내는 위용


한국영화계에 "괴물"이 등장했다.

"괴물"(제작 청어람)이 해냈다. 2003년 "살인의 추억"으로 잘 만든 드라마도 흥행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봉준호 감독은 그 후 자신에게 쏟아진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또 하나의 "물건"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순제작비만 무려 110억 원이 투입된, 장르적으로는 SF영화를 통해 한국영화의 비전을 제시했다.

깊이 없는 오락성이나, 찰기 없는 드라마, 내용 없는 비주얼 등 그동안 지적돼온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취약점들은 "괴물" 앞에서 다행히도 무력하게 무너진다. 그는 "괴물"을 통해 한국영화의 콤플렉스를 씻어내고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했던가. 일단 눈 씻고 찾아봐도 흠잡을 데가 없다. 한국영화의 기술력을 실험한 괴물 캐릭터는 그 독창성과 함께 화면에 완벽하게 녹아 들어갔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팔딱팔딱 살아 숨 쉬며, 영화를 지탱하는 드라마는 한순간도 호흡을 놓치지 않고 유연하게 흘러간다. 괴물이 유영하는 한강처럼 말이다. 사실은 꽤 큰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관객을 짓누르지 않는 것도 대단한 미덕이다.

또 "살인의 추억"에서 보여줬던, 감정을 요리하는 봉감독의 솜씨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발휘돼 희로애락의 감정이 탄사가 터져나올 만큼 적절한 타이밍에서 관객을 공략한다. 여기에 영화에는 곳곳에 상징과 은유가 지뢰처럼 놓여있어 여운을 진하게 남긴다. 감독은 단 한 번도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지 않았지만 영화와 관객 사이에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와 감흥이 놓여있다. 덕분에 극장을 나서면서 관객은 선물을 한 보따리 안고 나서는 느낌을 받을 듯 하다. 한마디로 "괴물"은 "살인의 추억"의 블록버스터형 진화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괴수가 등장하면서도 괴수 영화의 전형성을 탈피했다는 점에서 방점을 찍는다. 극 초반 난데없이 출현한 괴물이 혼을 빼놓지만 어느새 영화는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 과정에서 참으로 신기하게도 관객은 더 이상 괴물의 활약을 기대하거나 궁금해하지 않는다.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가족 구성원의 면면과 그들을 둘러싼 불합리한 환경, 그리고 그들의 외롭고 힘겨운 모습에 몰입하게 된다. 두말할 필요없이 잘 짜인 이야기의 힘이다.

이 힘과 함께 배우들의 연기력에도 찬사를 보낼 만 하다. 송강호는 다소 주춤했던 자신의 이름값을 한순간에 회복시켰다. 난생 처음 "평범한 아버지"를 연기했다는 변희봉은 연기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게 해줬다는 봉감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박해일은 박해일만이 할 수 있는 연기가 무엇인지 보여줬고, 배두나 역시 왜 그가 전문가들의 눈에 일찌감치 발탁됐는지에 대한 이유를 대중들에게 새삼 증명해 보인다.

"좋은 작품은 좋은 배우를 발굴한다"는 상식이 여기서도 통했다. 신예 고아성은 단숨에 관객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2000년 미8 군에서 독극물인 포르말린 수십 병을 하수구에 버린다. 그것은 고스란히 한강으로 흘러든다. 2006년 한강 둔치 평화로운 어느 날, 갑자기 기생물체가 출현해 아비규환을 만든다. 매점을 경영하는 소시민 박강두의 중학생 딸 현서도 괴물에 납치된다.

당국은 현서를 사망자로 분리하고 합동 분향소에 안치한다. 박강두에게 자신을 구해달라는 현서의 전화가 걸려오지만 경찰과 병원은 그를 정신이상자로 내몰며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도움을 구할 곳은 없다. 박강두와 그의 두 동생, 아버지는 자신들의 힘으로 현서를 구출하러 나서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공권력의 방해를 받는다. 설상가상으로 괴물에게서 바이러스가 유포되고 있다는 미국의 주장에 한국 정부가 끌려다니면서 괴물과 접촉했던 박강두는 온갖 모진 의학 실험의 대상이 된다.

사고쳐 낳은 딸을 금쪽 같이 여기는 다소 모자란 박강두(송강호 분)와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도 백수인 투덜이 남동생(박해일), 그리고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활 시위를 당기지 못하는 양궁선수 여동생(배두나) 등 주인공 3남매의 캐릭터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네 이웃을 대변한다. 여기에 이렇듯 각양각색의 자식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보살피는 박강두의 자상한 아버지(변희봉)의 모습은 영화가 제시하는 가족 상을 완성하는 울타리다.

특히 박강두와 모자란 그를 끌어안는 아버지의 투 샷, 박강두와 딸 현서의 투 샷은 돌부처도 눈물 흘리게 할 만큼 살가운 모습으로 화면을 수놓으며, 드라마를 견고하게 만든다. 와중에 등장하는 "새끼 잃은 부모 냄새, 그 썩어 문드러진 냄새가 십리 밖을 간다"는 대사는 가슴을 후벼판다.

창졸간에 일어난 괴물의 급습과 그로 인한 엄청난 피해는 거대한 권력이나 음모, 폭압에 시달려온 우리의 모습을 상징하기도 하며 동시에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재난을 떠올리게도 한다. 봉감독은 이에 대해 "관객에 따라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화면에는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뼈아프게 전개된다. 한국 사회에서 언제나 재난을 헤쳐나가는 마지막 주자는 개인이다. 비상 사태에도 뇌물을 요구하는 썩은 관리가 있고 개인의 입장은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되곤 한다.

극중 당국과 미국은 정보를 통제하고 시민을 볼모로 잡아 근거 없는 실험을 펼치고 실효성 없는 대책을 내놓는다. 심지어 있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웃지 못할 일은 "위에서 그런가 하면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필부필부(匹夫匹婦)의 모습이다. 이 대목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역시 영화는 이래야 한다. 1+1은 2라고 얘기하지 않아도 보는 사람이 알 수 있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그 결과가 2가 아닌 0이나 10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봉감독은 한국 대중 영화가 지향해야 하는 점을 명확히 보여줬다. 중언부언 말이 필요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괴물"은 악재가 겹쳐 잿빛으로 물든 작금의 한국 영화계에 광명을 던져줄 것이 확실하다.

12세 관람가. 27일 개봉.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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