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영혼을 치료한 파란 눈의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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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영혼을 치료한 파란 눈의 의사’
  • 최관식 기자
  • 승인 2017.11.0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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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4일(화) 연세의대 ‘맥라렌’ 교수 기념학술대회 개최
▲ 찰스 맥라렌 교수
우리나라 최초의 신경정신과 전문의로서 진료와 교육을 시행했던 호주 출신의 의료선교사 찰스 맥라렌(Charles Inglis McLaren, 1882-1957) 교수의 업적을 기리는 학술대회가 개최된다.

연세대의과대학(학장 송시영)은 11월14일(화) 오후 4시부터 연세암병원 서암강당에서 ‘맥라렌 교수 서거 60주년 기념학술대회’를 연다.

이날 학술대회는 맥라렌 교수의 고국인 호주를 대표해 주한호주대사인 제임스 최(James Choi) 대사가 축사를 할 예정이다. 이어 연세의대 민성길 명예교수와 여인석 교수(의사학과), 고신대 이상규 교수(신학과)가 맥라렌 교수의 생애와 한국 의학 및 사회발전에 끼친 업적을 조명할 예정이다.

김찬형 연세의대 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는 “32여 년간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큰 사랑을 갖고 우리나라 신경정신과학 토대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맥라렌 교수의 업적과 행적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학술대회”라며 맥라렌 교수가 주창한 인간 중심의 정신과학 치료와 연구 개념은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세의대는 11월 한 달간 세브란스병원 본관에서 맥라렌 교수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사진 전시전을 같이 열고 있다.

맥라렌의 일대기

호주의 명문의대 멜버른의대를 졸업하고 신경정신과학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한 맥라렌 교수는 선교사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의료선교에 자원해 1911년 9월 가족과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입국 직후 맥라렌 교수는 호주 장로교 교단이 경상남도 진주에 설립한 배돈병원에서 진료와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제2대 병원장으로 봉사했다.

배돈병원 근무 중인 1913년부터 맥라렌 교수는 연세의대의 전신인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출강하다가 1923년 에비슨 교장의 요청으로 진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맥라렌 교수는 세브란스병원에 신경정신과를 창설하고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서 신경정신과 과목을 본격적으로 교육하며 관련 전문의를 양성했다.

훗날 그의 한국인 제자인 이중철, 남명석 등은 세브란스의대와 서울의대 정신과 교수로 성장해 한국 신경정신과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엄격한 교육방식과 생활태도로 제자들에겐 어려운 스승이었지만 환자와 제자 그리고 한국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 컸던 맥라렌 교수는 마라연(馬羅連)이라는 한국이름을 짓고 세 명의 한국인 고아 여자아이를 입양해 모두 결혼까지 시키고 이 가운데 한 명은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기까지 했다.

근대의학이 도입되기 전까지 국내 정신질환자들은 무당의 굿이나 민간요법을 찾아야 할 귀신들린 병으로 치부,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버림받았다. 그나마 일제에 의해 운영되던 근대 병원들도 독일의학의 숙명론적 과학주의 전통을 이어받아 정신질환자들의 완전한 회복이나 사회복귀는 불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소극적인 약물 치료만 시행했다.

맥마렌 교수는 기독신앙을 바탕으로 정신질환 치료는 ‘영혼의 구혼’이라는 신념으로 환자를 온전한 인격체로 대우하고 정성껏 치료했다. 또 병의 결과인 증상 치료보다 예방적 측면을 강조해 환자들이 처한 환경에 대한 분석과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병의 예방, 나아가 근본적인 치료로 나아가는 ‘사회정신의학’ 개념을 세우기도 했다.

1930년 세브란스병원 내에 정신과병동을 개소해 기존의 수용소 개념인 정신과병동이 아닌 환자가 자해로부터 보호되면서 휴양과 의료진의 집중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진료시설로 만들었다.

이와 더불어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 철폐와 이들의 적극적인 사회복귀를 위한 다양한 사회 인식전환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맥라렌 교수가 열정적으로 세브란스에서 교육과 진료에 전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인인 제시 맥라렌(Jessie McLaren, 1883-1968) 여사의 도움이 컸다. 맥라렌 교수와 같은 선교사 집안에서 태어난 제시 여사는 멜버른대에서 영문학과 역사를 전공하고 문학석사를 받은 재원이었다. 남편과 함께 진주에 정착한 제시 여사는 고아원과 야학교를 열어 교육과 사회계몽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남자 중심의 YMCA와 구별되는 조선여자기독청년회(YWCA)를 김필례, 김활란, 이화학당 교장이던 아펜젤러 여사 등과 같이 1922년 출범시켜 여성들의 개화와 지위향상에 큰 기여를 했다.

맥라렌 교수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교수로 서울에 부임하자 제시 여사도 이화여전에서 역사와 영어를 가르쳤으며, 1935년 이화여전이 신촌캠퍼스로 이전 시 조경과 건물배치 등의 캠퍼스 디자인을 담당했다.

아울러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다양한 번역 및 기고를 통해 한국을 서구사회에 알리는 데 일조했으며, 영국 왕립아시아학회와 기독문서협회 한국지부 사서로서 다양한 한국의 고문헌을 알리고 직접 수집하기도 했다. 제시 여사가 수집한 한국의 각종 고서들은 사후 딸인 레이철 휴만이 호주 캔버라에 있는 호주국립도서관에 기증해 현재까지 ‘맥라렌-휴만장서’로 보존되고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기독설립정신을 가진 학교로 대부분의 구성원이 기독신앙인이었던 세브란스의전에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할 시 폐교와 함께 거부자를 투옥하겠다는 통첩을 보내왔다. 이에 학교를 살려 끝까지 한국인 의사를 키워야 한다는 신사참배의 불가피론으로 교내 여론이 기울자 맥라렌 교수는 동료 해외선교사 출신 교수진과 함께 1938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이전에 봉사하던 경남 진주 배돈병원으로 복귀했다.

진주에서도 신사참배 거부와 함께 일제의 폭정에 비판적이던 맥라렌 교수는 1941년 12월8일 일제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공습일 날 적성국 국민으로 진주경찰서에 긴급 체포돼 11주간 투옥된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가택연금에 처해진 맥라렌 교수는 1942년 6월 일본 고베로 이송돼 다른 서양인 포로들과 함께 억류됐다. 이후 수개월간 일본 억류 중 일제가 연합국 내 억류된 자국민을 석방시키기 위한 교환포로로 동아프리카의 포르투갈령 로렌코 마르크 지역까지 이동한 후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어 같은 해 11월 모국인 호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맥라렌 교수는 호주로 돌아오자 한국에서의 자신의 투옥 생활을 담은 ‘일본감옥에서의 11주’라는 저서를 발간해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태평양전쟁 종전 후 한국으로의 복귀를 바로 계획했으나 진주 배돈병원은 폐원된 상황이었고, 세브란스 또한 광복 후 여러 사정으로 그를 바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건강악화는 한국으로 가는 맥라렌 교수의 몸을 주저 앉혔다.

맥라렌 교수는 6·25전쟁을 맞은 한국정부를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전개하고 세브란스의 제자인 이봉은을 초청해 멜버른의과대학 정신과에서 유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남은 생애도 세브란스병원과 한국인 제자를 위한 다양한 후원을 펼쳤다.

그는 1957년 10월9일 75세를 일기로 한국 신경정신의학의 토대를 놓은 파란 눈의 의사로서의 생애를 마쳤다.
▲ 한국에서의 투옥 경험을 기록한 맥라렌 교수의 저서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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