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너는 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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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너는 내 운명
  • 윤종원
  • 승인 2005.09.0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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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에이즈(AIDS)에 걸렸다면?

"같이 성관계를 한 사람은 없었을까", "성관계를 맺었다면 왜 그랬을까"라는 자기 방어적인 호기심이 지나간 다음에는 "얼마나 문란했으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쉬운 동정이나 "그러게 몸 막 굴린 벌을 받는 거야"쯤 되는 교훈적 결론이 이어지기 십상이다.

에이즈에 걸린 여자와 그녀의 남편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너는 내 운명"(제작 영화사봄)이 23일부터 관객들을 만난다.

"죽어도 좋아"의 박진표 감독이 두번째 장편 "너는 내 운명"에서 그려낸 사랑 이야기는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스타일도 풍부한 은유도 담고 있지 않지만 사람과 사랑에 대한 꾸밈없는 접근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죽어도 좋아"에서 70대 노인에게 더 이상 사랑이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깼던 것처럼 감독은 에이즈에 걸린 여성이라는 오해하기 딱 좋은 소재를 가지고 그 뒤에 숨겨진 사랑 이야기를 찾아 그려내고 있다.

온갖 신파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매력은 "담백하다"는 데 있다. 사랑이라는 게 뭘까? 이 세상에서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지는 우리에게 영화는 소박하지만 솜씨 좋은 말투로, 그리고 힘 있게 이런 운명적인 사랑도 있다고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에는 현란한 스타일도, 징글맞을 정도의 열연도, 자극적으로 감정선을 울려대는 통속성도, 그리고 마음에 오래 남을 만한 결정적인 대사도 눈에 띌 정도로 드러나 있지 않다.

줄거리는 높낮이 없이 잔잔히 흘러가지만 보는 사람의 감정은 차근차근 쌓여가다가 걷잡을 수없이 커져간다. 신파와 "쿨(cool)"함 사이에서 꾸미지 않은 매력을 간직한 이 영화를 보다 보면 관객의 선택은 두가지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결국 눈물을 터뜨리거나, 아니면 참다가 뜨거워진 눈물을 목구멍으로 삼키거나. 사랑을 기다리는 노총각 석중(황정민). 젖소 한마리를 키우며 목장 운영을 꿈꾸는 이 남자, 필리핀까지 가서 신붓감을 고르기도 하지만 사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생각도 하지않고 있다. "죽을 때까지 결혼 못해도 사는 데 지장 없잖아. 안하면 안했지". 엄마의 잔소리에 목소리를 높이는 석중. 사랑 한 번 못해본 숙맥이다.

사랑에 지친 여자 은하(전도연). 읍내 다방 "귀빈"에 새로 온 그녀는 뭔가 사연이 많아 보인다. 친절하고 싹싹하고 예쁘고…. 왠지 이곳까지 흘러들 인물이 아닌 듯한 그녀에게는 아픈 기억들이 많다. "달랑 사랑 하나 가지고 사랑이 되는줄 알아?"라고 내뱉으며 사랑을 불신하는 그녀. "나 때문에 아저씨 인생까지 망칠지도 모른다"는 말은 석중의 프로포즈를 받고 그녀가 내던지는 말이다.

매일 아침 직접 짠 우유를 배달하고 술취한 자신을 오토바이로 데려다주는 석중의 진심에 반한 은하.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골인해 행복한 신혼생활을 시작하지만 은하에게 에이즈 선고가 내려진다.

감독의 카메라는 그저 인물들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사건들을 쫓아갈 뿐, 애초에 눈물을 강요하거나 사랑을 떠들썩하게 과장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는 듯하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매력은 신파와 "쿨"함의 중간 쯤에서 나오고 이는 인물과 사건에 대한 감독의 진정성이 하나씩 쌓여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빛을 발한다.

사랑도 불안도 원망도 감춤 없이, 그리고 과장 없이 드러내는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는 이런 진정성을 통해 강한 힘을 갖게 되고 이는 보는 이들의 마음에 뭉클한 감동으로 와 닿는다.

영화 속 사랑이야기가 관객들에게 어필한다면 이는 두 주인공 황정민과 전도연의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있는 연기 덕이 크다. 그동안 이들을 신뢰하지 않았던 영화팬들조차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 수밖에 없을 정도. 상황에 묻혀 있어 튀지 않지만 이들 말고는 못해낼 것 같은 영화 속 연기는 포장하려하지 않는 영화 전체의 톤과 닮아 있다. 러닝타임 121분. 18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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