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정책, '수요' 아닌 '필요도'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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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정책, '수요' 아닌 '필요도' 접근
  • 최관식 기자
  • 승인 2015.09.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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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식 건강복지정책연구원장 보건의료체계 패러다임 근본적 변화 필요성 지적
우리나라 보건의료정책의 패러다임을 기존의 자유시장 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수요’ 접근이 아니라 건강보험형 체계에 따른 ‘필요도’ 접근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건강보험제도의 경우도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도입됐음을 이해하고 기본권 보장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지만 마치 복지시혜를 베푸는 양 운영함으로써 오늘날 의료쇼핑과 공공의료의 몰락, 감염병에 취약한 의료환경을 초래했다는 것.

따라서 기존의 시장형 관리체계를 사회보험형 의료체계에 부합되게 보건의료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진료권 재설정과 환자의뢰체계를 정립해 남는 비용으로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가 가능하도록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규식 건강복지정책연구원장은 최근 발간한 이슈페이퍼 ‘메르스 대책과 보건의료정책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메르스 사태 이후 논의되고 있는 방역체계 개편 논의가 제대로 실효성을 거두려면 보건의료정책의 근본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이 원장은 “우리나라는 사회보험방식으로 국민의 의료를 보장하는 국가들에서 의료체계를 운영하는 정책원리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의료체계를 운영하는 정책을 사용함에 따라 오늘의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며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적은 국민의료비를 사용한다고 자랑하지만 실상을 보면 민간과 공공 구분 없이 영리에 치중하고 있는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사회보험방식의 건강보험제도를 도입해 전국민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의료’나 ‘의료민영화’와 같은 문제로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간의 대립까지 보이는 등 다른 사회보험국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정부가 국민의 의료를 보장하기 위해 건강보험제도를 실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기관이 감염관리를 위시한 환자 안전관리나 응급실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건강보험 수가가 뒷받침되지 못하니 메르스가 걷잡을 수 없이 병원 내에서 전염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환자들이 대형병원으로 쏠리는 현상도 다른 사회보험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문제라고 그는 지적했다.

이는 정부가 건강보험형 의료체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게 이규식 원장의 시각이다.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자유시장형 체계가 아니라 건강보험에 의해 지배되는 체계로 가격이 시장에서 결정되지 않으며, 의료 수요자인 환자에게는 가격이 의미가 없고 단지 공급자에게만 의미가 있다는 점을 정부가 간과하고 있다는 것.

의료가격이 환자에게 의미가 없다는 점은 정책 수립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정부가 이 점을 도외시하고 정책을 수립함에 따라 오늘의 문제가 초래됐다고 이 원장은 주장했다.

가격을 정부가 결정하는 현 체계에서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며, 국민의 의료이용에 대해 아무런 통제도 하지 않으니 의료이용률이 전세계에서 가장 높고 의료쇼핑이 다반사가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

이규식 원장은 “가격은 공급자에게는 매우 중요하다”며 “외과계열에 의사가 부족한 것은 바로 낮은 가격 책정으로 생산자의 생산 의욕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또 건강보험제도에서는 국민이 필요로 하는 의료의 양을 정부 혹은 보험자가 판단해 사전에 정하게 되는데 이에는 수요 접근이 아니라 필요도 접근이 필요하며 반드시 의료계획이 필요하다고 이규식 원장은 강조했다.

이 계획에는 의사나 병상 등에 대한 수급계획이 포함돼 의료자원이 부족해지거나 과잉되는 것을 방지하게 되며 필요도에 따른 의료이용을 할 수 있도록 보험자가 진료권을 설정하고 단계적인 의료이용이 되도록 환자의뢰체계를 설정하는 등의 관리를 해야 된다는 것.

하지만 우리나라는 건강보험제도 아래에서 의료를 시장에 맡기면 안 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자유방임형으로 운영해 문제를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그는 “우리 정부는 의료 가격이 소비자인 환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진료권을 없애고 환자의뢰체계를 상급종합병원에만 적용하는 방식으로 방임해 마치 시장형 의료체계를 갖고 있는 양 잘못된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공공병원마저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영리적 행태를 보이고 있으며, 의료계가 의료공급과 관련된 정부의 규제에 반발하게 됐다고 이 원장은 덧붙였다.

메르스 사태 역시 환자 한 사람이 4~5개 병원을 전전하면서 확산된 사례라고 지목했다.

이규식 원장은 기본권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하는 국가들은 △보편적 적용(universal coverage) △포괄적 제공(comprehensive services) △최소수준 서비스(national minimum)라는 3가지 원칙을 갖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이같은 이념을 설정하지 못하고 건강보험제도 안에 비급여를 허용하고 선택진료나 상급병실과 같은 제도를 일반화함에 따라 의료가 영리화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민간병원뿐만 아니라 국립대병원이나 공공병원조차 영리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정부가 시장형 의료체계인 양 시그널을 잘못 보낸 정책의 책임이라고 이 원장은 강조했다.

이규식 원장은 “국민이 보험료를 내고 그 바탕 위에서 제도를 운영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시혜적인 제도나 되듯이 수가를 낮게 책정해 기본권 보장은 고사하고 병원에서 기본권이 무시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며 “우리보다 소득이 훨씬 낮은 베트남도 입원환자는 간호사가 간호하고 있어 가족간호는 엄두도 못내며, 중환자실을 1인실 내지는 2인실로 해 간호사가 24시간 감시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건강보험이 없을 때는 시·도립병원이나 적십자병원이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구원처가 됐지만 건강보험제도 아래에서는 의료가격이 소비자에게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이같은 공공병원의 역할 또한 무의미해지는 만큼 메르스확산의 배경으로 공공의료가 부족했다거나 공공의료가 문제가 있다는 식의 진단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결국 새로운 정책 방향은 지금까지의 보건의료정책 패러다임을 시장형 관리체계에서 사회보험형 의료체계에 부합되게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와 함께 건강보험제도의 운영도 기본권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보편적 적용과 포괄적 제공, 최소수준 서비스라는 3원칙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진료권을 다시 설정하고 환자의뢰체계를 정립해 의료이용에 대한 일정한 규제를 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규식 원장은 또 보건소의 기능 중 의사가 없는 농어촌 지역을 제외하고는 진료기능을 배제하는 등 공중보건정책을 재편하고 공공병원은 민간병원이 맡기 어려운 특수기능을 중심으로 재정립하는 등의 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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