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증책임의 완화와 의무기록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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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증책임의 완화와 의무기록의 아이러니
  • 병원신문
  • 승인 2014.07.14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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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고도 장기백 변호사
▲ 장기백 변호사
입증책임의 일반 원칙입증책임이라 함은, 증명해야 할 사실의 존재가 불분명한 경우에 입증당사자가 부담하는 불이익을 말한다. ‘A에게 입증책임이 있다’는 말은 곧, ‘A가 주장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A에게 불이익한 판단이 내려진다’는 말과 같다. 손해배상 소송에서 입증책임은 원칙적으로 피해자인 원고가 부담한다. 이는 의료과오소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원칙적으로 환자가 치료과오의 존재 및 발생된 손해와 의사의 치료과오 사이의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한다.

입증책임 완화의 필요성

그런데 의료행위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이고, 의료기법은 의사의 재량에 의지하므로 인과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의료전문인이 아닌 환자로서는 도저히 밝혀낼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 이에 우리 법원은, 여러 이론을 통하여 환자의 입증책임을 상당부분 완화시키고 있다.

입증책임 완화의 측면들

환자는 원칙적으로 ① 의사가 과실 있는 의료행위를 하였다는 점, 즉 과실과 ② 그 과실 있는 의료행위가 실제 손해라는 결과를 야기하였음, 즉 인과관계를 모두 입증해야 한다. 물론 우리 법원은 환자의 위 2가지 입증책임을 모두 완화시키고 있다. 구체적인 방향은 다음과 같다.

① 과실의 입증과 관련하여, 우리 법원은 ⓐ 간접사실의 입증에 의한 과실 추정과 ⓑ 과실 개념의 완화를 인정한다.

ⓐ 간접사실의 입증에 의한 과실 추정이란, 여러 제반사정을 고려할 때 부적절한 의료행위로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반면, 다른 원인이 개입하여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낮은 경우, 과실로 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심방중격결손 수술을 위한 캐뉼라 삽관 직후에 나타난 대동맥박리로 환자가 사망한 경우, 의사의 과실이 추정된다는 것이다(대법원 2000. 7. 7. 선고 99다66328 판결 참조).

ⓑ 과실 개념의 완화란, 환자의 진료과실 입증의 정도에서 의학적 엄밀성을 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환자는 「일반인의 상식에 바탕을 둔 의료상의 과실」만 입증하면 된다(대법원 1995. 2. 10. 선고 93다52402 판결 참조).

② 인과관계의 입증과 관련하여, 우리 법원은 「일반인의 상식에 바탕을 둔 의료상의 과실」이 입증되는 경우, 인과관계를 추정함으로써 입증책임을 아예 전환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경우, 실제로 의사가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방법으로는 의료행위 이전에 있던 건강상 결함, 즉 기왕력의 존재를 밝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③ 마지막으로 위자료가 있다. 즉 ⑴ 의사의 과실이 입증되었으나 ⑵ 그 과실이 결과와 인과관계가 없음이 밝혀진 경우에도, 의사가 환자에게 적절한 의료를 받거나 일정 시기까지 생존이 예상되는 기대권 내지 기회가 상실되었음을 이유로 위자료청구권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는 손해배상과 관련한 대원칙에 비추어 볼 때 대단히 이례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 대법원은 ‘일반인의 처지에서 보아 수인한도를 넘어설 만큼 현저하게 불성실한 진료를 행한 것이라고 평가될 정도에 이른 경우’에만 위자료가 인정될 수 있다고 하여, 그 조건을 제한하기는 하였다. 과연 어느 정도로 불성실한 진료를 행하였을 때, 일반인의 처지에서 보아 수인한도를 넘어설 수 있는지는 각자 상상해보자.

의무기록의 아이러니

위와 같은 입증책임의 완화에 대해 반대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은데, 가장 큰 논거는 의료과오소송은 공해소송과 달리 입증을 위한 증거, 즉 의무기록을 환자가 쉽게 입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료법은 제21조를 통하여 환자가 자신의 의무기록을 쉽게 확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증거가 일방에게 비밀리에 감춰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손해배상의 대원칙을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일견 일리 있는 주장이다.

재미있는 것은, 의무기록을 소상히 기재하는 것이 반드시 의사 입장에서 과실 없음을 증명하기에 유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리 꼼꼼하게 기재된 의무기록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실을 기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촘촘하게 기재된 의무기록 사이에서 한두 가지 맞지 않는 점을 찾아내는 것이 의무기록이 허술한 상태에서 막연히 과실을 찾는 것보다 외려 쉽기 때문이다. 자세히 쓴 의무기록에서는 과실을 찾을 수 있으나, 뜨문뜨문 작성된 의무기록에서는 찾을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셈이다.

이와 같은 의무기록의 아이러니는 결국 입증책임의 완화, 또는 전환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입증책임의 일반 원칙을 엄격히 적용한다면, 성실하게 의무기록을 작성한 의사가 오히려 손해를 보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입증책임의 완화의 당초 취지를 고려할 때, 의무기록이 충분히 갖춰진 경우에는 법원 역시 손해배상의 일반원칙으로 돌아가 판단함이 타당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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