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에 앞서 공개된 예고편이 영화를 소개하는데 있어 참 미흡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11일 공개된 "천군"의 면모는 상당히 신선했고 부담없었다. 역사적 영웅의 이면을 조명한 재기발랄한 영화적 상상력은 결코 무책임하게 펼쳐지지 않았으며 동시에 소재를 넘어 "니들(남북한)은 적도 아닌데 왜 맨날 이렇게 싸우냐"라는 메시지가 따분하지 않게 표현됐다.
2005년 남북한이 공동으로 개발한 핵탄두 비격진천뢰가 미국에 양도될 상황이 벌어지자 북한군 소좌 강만길(김승우 분)은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비격진천뢰를 빼돌려 압록강으로 도망친다. 이때 433년만에 지구를 지나는 혜성의 이상 작용으로 강만길 일행과 그를 쫓아가던 남한장교 박정우(황정민 분) 일행은 순식간에 강력한 빛에 흡수돼 사라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들이 떨어진 곳은 1577년 조선 변방. 오랑캐 여진족의 습격에 민중들이 피폐된 삶을 살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일행은 도적질과 밀매를 일삼으며 제멋대로 살아가는 더벅머리 스물여덟살 청년 이순신(박중훈 분)과 맞닥뜨린다.
이 영화를 말로 설명하자면 길고 복잡한 듯 하지만 실제 화면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다. 과거로 간 주인공들은 이순신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영웅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 무과 시험에 떨어져 인생을 포기한 이순신에게 "넌 4년 후 무과에 붙을 거고 훌륭한 영웅이 될거야"라고 잔소리를 겸한 은근한 "최면"을 걸어댄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문. 이들의 등장으로 역사는 왜곡되는 것일까. 영화는 이 부분을 지혜롭게 넘어섰다. "난 왜 맨날 이러냐. 꼬이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라며 삶을 한탄하고, 미래에서 온 이들의 말에 콧방귀도 안 뀌던 이순신은 천진난만한 꼬마가 오랑캐에게 무참하게 당하는 것을 목격한 후 스스로 대오각성, 180도 변신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시대적 충돌"의 재미를 빼먹지 않았다. 400여년 전이니 이 시대의 물건은 뭐든 현대로 가져가기만 하면 엄청난 가치를 인정받는 문화재가 되는 것. 반대로 수류탄이니 총이니 첨단 무기도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가 되는 것이다. 박정우가 재빨리 펜을 건네 이순신의 사인을 받는 재치도 귀엽다.
또한 이순신에 대한 남북한의 시각 차이도 적절히 이용했다. 박정우 일행이 이순신 "교화"에 올인하는 동안 강만길 일행은 어딘가에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찾는데 집중하는 모습을 대비시켜 이순신 외에 시선을 돌릴 여유를 준다. 또한 시시각각 죄어오는 오랑캐의 공세 역시 한 축에 놓고 그들과의 대결에서는 꽤 생생한 액션 장면을 끌어냈다.
신인 민준기 감독은 1999년 "왜적대장 "평수가"는 무리를 이끌고 종묘로 들어갔는데 밤마다 신병(神兵)이 나타나 공격하는 바람에 적들은 놀라서 서로 칼로 치다가 시력을 잃은 자가 많았고 죽은 자도 많았다"는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권26에 실린 한 줄 글귀에 착안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 정체에 대한 설명이 일절 없는 "신병"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춰, 미래에서 온 주인공들이 이순신 시대 사람들에게는 하늘에서 내려 온 군대인 "천군"일 수도 있다는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자칫 허무맹랑하게 흐를 수 있던 영화는 욕심 부리지 않은 감독의 연출과 박중훈 김승우 황정민 등 주인공들의 고른 호연으로 오락 영화로서의 무게 중심을 잡는데 성공했다. 박중훈은 특유의 코믹함과 관록 사이에서 중간 지점을 잘 잡았고 김승우가 오랜만에 보여준 진중한 연기도 매력적이었다.
"천군"은 정교하지도 않고 견고하지도 않다. 막판에 울컥 울음을 토해내게 하지도 못했다. 모든 게 2%씩 부족하다. 그러나 이만하면 치명적인 약점 없이 재기발랄한 소재를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넓혀주는 퓨전 사극으로서의 존재감은 충분하다.
힘이 부족해 남과 북이 열강의 말에 눈치를 보는 현실은 오랑캐의 침략에 바람 잘 날 없는 조선 시대와 다를 바 없다는 시선. 이럴 때 왜 한민족끼리 으르렁 대느냐는 단순 명료한 메시지가 그다지 식상하게 들리지 않는 것이 그 증거. 전개 과정이 지루하지 않다는 것 역시 큰 장점이다.
14일 개봉,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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