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의 황무지 조명한 "고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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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의 황무지 조명한 "고갈"
  • 윤종원
  • 승인 2009.08.24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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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이나 주인공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비극적 영화는 관객에게 기쁨이나 카타르시스(감정의 정화)를 준다.

이 때문에 전통적인 영화 문법을 지키는 감독들은 희ㆍ비극을 추구하거나 혹은 이 둘을 뒤섞어 관객들을 끌어모으려 한다.

그러나 "비타협영화집단" 곡사를 이끌며 영화 13편을 만든 김곡 감독은 관객들의 편의를 맞추기 위해 이러한 기존 영화 공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의 영화 "고갈"은 이 같은 경향의 정점에 서 있다. 웃음과 눈물 대신 스멀거리는 불편함만을 관객들에게 선사하기 때문이다.

"고갈"은 스토리가 거의 없다. 시대와 장소가 어디인지 모르는 한 황폐한 공간 안에서 한 남자(박지환)가 언어장애인 여성(장리우)을 매춘시킨다는 내용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전혀 친절하지 않다. 남녀 주인공의 관계가 무엇인지, 도대체 왜 매춘을 시켜야 하는지 등 여러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의 형식미라든가 이미지는 매우 독특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문득문득 머리를 스쳐가는 장면이 상당하다.

반복적으로 보이는 굴뚝의 연기라든가, 섹스할 때 아무런 감흥도 없는 무심한 여성의 눈빛, 소시지를 우걱우걱 씹어먹는 여성의 모습, 그리고 갯벌에서 마치 아이처럼 진흙싸움을 하는 남녀주인공의 모습 등은 인상적이다.

이러한 인상적인 효과는 인물의 표정을 세밀하게 잡는 극단적인 클로즈업이나 한 장면을 길게 찍는 롱테이크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측면이 크다.

여기에 슈퍼 8㎜ 필름을 35㎜ 크기로 확대한 후 다시 디지털(HD)화 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거칠고, 황폐한 느낌의 화면을 만들어낸 점도 이러한 분위기에 한몫했다.

수간 장면이 담긴 포르노를 보여주거나 배를 가르며 자해하는 장면, 아이가 태어나는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등 막장까지 끌고 가는 감독의 연출이 고집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배우의 연기력은 훌륭하다.

장리우는 대사 한마디 없이 인간의 결핍과 공포, 그리고 분노의 감정들을 훌륭히 묘사하고, 박지환과 중국집 배달부로 나오는 오근영의 연기도 치밀하고 과하지 않다.

상영시간이 128분에 달하는 "고갈"은 작년 서울독립영화제 대상 수상작이자 시라큐스 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과 여우주연상, 감독상을 거머쥐며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작품이다. 서울독립영화제가 처음으로 배급했다.

다음달 3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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