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피와 뼈
상태바
<새영화> 피와 뼈
  • 윤종원
  • 승인 2005.02.17 08: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피와 뼈가 붙어 있다고 인간인가. 피와 뼈를 물려줬다고 부모인가. 최양일 감독은 "피와 뼈는 인간과 가족 관계를 말한다. 뼈 안에는 무엇이 있고 피 안에는 무엇이 흐르고 있는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었 다"고 밝혔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단어는 폭력이다. 시대가 폭력이고 생존이 폭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자체가 폭력적이다. 진저리날만큼.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라는 점, 그것이 재일한국인의 삶이고 작가와 감독이 모두 재일한국인이라는 점은 분명 한국 관객에게 묵직한 무게로 다가온다. 눈을 크게 뜨고 영화를 직시해야할 것 같다.

그런데 그 냄새가 역하다. 고개를 돌려 애써 피하고 싶다. 그러나 영화는 관객의 턱을 부여잡고 강제로 입을 벌린다. 그리고 소화하기 힘든 날 것과 썩은 것을 동시에 쑤셔 넣는다.

1923년 오사카. 일련의 한국인들이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다. 이들은 불결한 빈민가에 촘촘히 어깨를 맞대고 뿌리를 내린다. 모두가 살아남아야했다. 한복입고 제사지내고, 결혼식날 신랑의 발바닥을 북어로 때리는 풍습은 꾸역꾸역 지켜가지만 한국어는 "장인어른"과 "형님"을 구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영화는 주변인에게 결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오로지한 사람, 김준평(기타노 다케시 분)에게 초첨을 맞춘다. 청운의 꿈을 안고 도일했을 그의 모습은 그러나 극 초반부터 광폭하고 탐욕스러운 중년으로 그려진다.

마누라는 상습적으로 성폭행하고 자식들은 하찮은 벌레 취급하는 이 남자는 자신이 인간임을 잊은 듯 하다. 여자를 섹스 도구로 생각하며 오로지 돈에만 관심있는 그는 발정난 돼지 같은 모습으로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한다. 그중 가장 기가 찬 풍경은 자신의 아들들과 처절한 육박전을 벌일 때. 이들 부자 앞에 인륜은 공허할 뿐이다.

그런 그가 딱 한번 의외의 모습을 보인다. 섹스 노리개로 삼던 기요코가 뇌종양수술을 받고 거동도 못하는 바보가 됐음에도 버리지 않고 정성들여 간호하는 것. 피와 뼈를 나눈 가족들에게는 한번도 보이지 않던 행동. 그러나 이마저도 사실은 또다른 정부를 들이며 자식을 넷이나 까발리는 짓과 병행한 것이다. 욕정만큼 그의 자식에 대한 욕심도 거대하다. 역시 피와 뼈에 대한 집착이다.

영화는 김준평의 무소불위 광기와 폭력을 가감없이 따라가며 50-70년대 재일한 국인들의 지난한 삶을 중간중간 훑었다. 젊은층의 북에 대한 동경과 한국인끼리의 결혼을 고집하려는 노력이 살짝 그려진다.

마을 잔치 때 잡힌 커다란 돼지가 난도질되는 장면은 어쩌면 당시 재일한국인의 삶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시뻘건 피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고, 대야 가득 쏟아지는 구불구불한 내장은 보상받을 길 없는 고단한 삶이다.

그러나 혼란스럽다. 김준평의 모습을 뒷받침하는 설명이 싹둑 잘라져나갔다. 거두절미하고 김준평의 아들 마사오의 눈으로 괴물 같은 아버지의 비상식적인 짓거리들이 나열되는 것이다.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나, 인간성을 상실한 시대가 그를 그렇게 내몰았다는 식의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이 때문에 각종 묘사가 사실적이고 기타노 다케시의 연기가 두려움을 자아낼 정도로 질퍽함에도 영화는 당위성을 줌으로써 끌어낼 수 있는 감동을 놓치고 간다. 아버지는 그저 "죽이고픈 괴물"이고 화면은 시종 힘겹다. 도대체 인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이 기요코는 왜 돌보는가.

기타노 다케시의 연기는 스스로 평했듯 최고다. 무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담아내는 그의 연기에는 전율이 느껴진다. 사악한 눈빛은 금방이라도 스크린을 갈기갈기 찢고 튕겨나올 듯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쉽다. 김준평은 "고작" 그렇게 여생을 마감하려고 짐승처럼 살았던가. 종종 튀어나오는 한국어 대사가 통 귀에 붙지 않는 것처럼 영화는 뭔가 공회전을 하는 듯하다. 묵직한 진심을 담은 것 같지만 허기를 채우기에는 부족하다.

25일 개봉, 18세 관람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