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청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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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청연
  • 윤종원
  • 승인 2005.12.23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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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고 삶을 잃은 여비행사의 비상
평생의 꿈을 이루는 그 순간, 가장 비참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서 있다. 조국과 자존심도 버린 채 그토록 소망해왔던 일이지만 사랑도, 후배도, 그리고 삶의 정당성마저 잃어버린 그에게 남겨진 게 과연 무엇일까.

박경원에게 "하늘을 날 만큼" 기분 좋아야 할 하늘을 나는 일이 굴레가 돼버린 영화 속 한 장면은 이 영화가 과연 뭘 보여주고자 하는지 분명히 드러낸다.

올 한 해를 마무리지을 블록버스터가 드디어 모습을 공개했다. 제작기간만 3년. 93억원의 제작비가 제때 충당되지 못해 촬영이 중단되기도 몇 차례. 그럼에도 윤종찬 감독은 끝까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박경원이 그랬던 것처럼.

"태풍"에 이어 "청연" 역시 한국 영화의 촬영 기술이 이젠 꽤 업그레이드됐음을 느끼게 한다. 깨끗한 화면 속에 펼쳐지는 비행 장면은 압권. 복엽기(複葉機)의 고공비행 장면은 스릴과 시원함을 함께 전해준다. "비행에서 오는 감정의 굴곡과 착잡함을 담으려 했다"는 윤 감독의 의도는 감히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개봉 직전 박경원의 친일 행적 논란이 불거졌다. 이에 대해 "피해갈 생각 없었다. 사실(史實)이니까. 영화를 보면 알게 될 것"이라 말했던 윤 감독의 발언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드러난다. 영화는 오히려 박경원의 친일 행적이라는 좋은 소재를 활용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던 한 여자의 삶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더할 나위 없는 소재다.

박경원(장진영 분)은 하늘을 날겠다는 꿈 하나로 일본 비행학교에 입학한다. 고학생인 그는 밤에는 택시 정비를 한다. 대타로 택시를 몰았던 날 평생의 운명이 될 남자 한지혁(김주혁)을 만난다. 그는 친일파 아버지를 둔 까닭에 방황하며 자기 자신을 방치하며 살아간다.

아버지의 명령대로 군에 입대한 한지혁이 1년 후 박경원의 비행학교가 있는 부대에 배치받으며 두 사람은 사랑과 믿음을 키워간다. 여기에 귀여운 후배 이정희(한지민)와 강세기(김태현)까지. 더 이상 행복한 날들이 없다. 스승이자 동료인 다치가와 교관(나카무라 도루)까지 곁에 있으니.

거칠 것 없는 박경원에게 적당한 일본인 경쟁자까지 등장한다. 비행학교 경연대회 랠리 부문 출전자인 박경원을 밀치고 모델이자 외무성 장관의 애인인 기베(유민)가 최종 출전자가 된다. 그는 박경원의 꿈을 알게 된 후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갑작스런 강세기의 죽음으로 주력이 아닌 고공 비행 종목에 출전하게 된 박경원의 비행 장면은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 실제 협곡에서 촬영된 것이다. 미국 LA 근교에서 미국에도 단 2대밖에 없는 스페이스캠과 실제 복엽기 4대, 촬영 전용 헬기를 동원해 촬영했다. 그만큼 실감나는 영상이 제작진의 노력에 화답했다.

이젠 갈등 국면. 한지혁은 "결혼하자"고 갑자기 조른다. 모든 게 불안하다며. 언젠가 네가 훌쩍 떠나버릴지 모른다며. 그러나 박경원에게는 지혁의 요구가 부담스럽다. 일본에서 조국 조선을 거쳐 만주로, 그 후 유럽으로. 비행기로 세계 끝까지 가보겠다는 그의 평생 소망을 이제 이루려 하는데 주변의 반응이 냉담하다.

특히 조선인의 싸늘한 시선은 일제시대 비행을 하기 위해서는 조국보다는 일본에 동화돼야 했던 박경원이 어떤 갈등을 겪어야 하는지 보여준다. 더욱이 지혁의 절친한 친구가 암살단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지혁과 경원은 고문까지 당한다.

경원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조국이냐, 꿈이냐. 극단적인 선택이다. 만주까지 비행을 허락받고 지원받으려면 일본의 영광을 선전해야 한다.

혼란과 혼돈에 빠져 있는 그에게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지혁은 "꿈을 이루라"고 말한다. "박경원이 비행밖에 몰랐지, 언제 조국 때문에 고민했나. 조선이 네게 해준 게 뭐가 있느냐"라며. 그리고 지혁은 죽는다.

경원은 죽은 지혁과 함께 하는 비행을 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청연"으로 이름붙인 자신의 비행기 앞에서 일장기를 들고 서 있는 경원의 표정은 모든 것을 다 잃은 듯하다.

영화는 극적이다. 박경원의 삶에서 드라마틱한 여정을 뽑아냈다. 감독 표현대로 "백일몽 같은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또 감내한 한 비극적인 여자의 삶이 담겨 있다. 가공의 인물 한지혁은 극적 갈등을 배가시켜주는 인물이다.

이 작품을 촬영하는 내내 "청연"에만 전념했던 장진영에겐 뿌듯한 작품이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한 연기라는 점은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만하다. 그러나 영화가 워낙 대작인지라 주인공에 대한 관객의 공감대를 유발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김주혁은 올해 이 영화보다 나중에 촬영한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과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로 흥행성까지 인정받게 됐다. 그러나 영화 "청연"을 보면 그의 만만찮은 연기 내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지혁이 박경원을 서포트하는 인물이듯, 나도 장진영 씨를 도와주면 됐다"는 겸손한 표현에 그친 게 아니라 한지혁으로 인해 박경원의 갈등이 제대로 살아났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 한지혁은 결코 박경원보다 더 평가받지 않아야 한다. 영화가 살려면. 한지혁 덕분에 더욱 치밀해진 영화의 구성은 김주혁의 뛰어난 연기로 박경원보다 오히려 너무 존재감이 살아나는 바람에 쓰라린 약점이 돼버렸다.

"소름"에 이어 두번째로 호흡을 맞춘 윤종찬 감독과 장진영 콤비의 서로에 대한 기대와 신뢰는 충분히 느껴진다.

29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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