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유통기한 한참 지나 상해도 너무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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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유통기한 한참 지나 상해도 너무 상했다
  • 정윤식 기자
  • 승인 2022.06.07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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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도 요양급여비용 계약에서 기존 협상 방식 문제점 극에 달해
병원신문 정윤식 기자
병원신문 정윤식 기자

냉장고에 우유가 하나 있다.

유통기한이 지나 상한 것도 알고 있고, 이를 마시면 배탈을 유발해 고생할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음료수를 구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우유에 손을 댔고 친구들과 나눠서 벌컥벌컥 마셨다.

혹시나 별일 없을까 했지만, 역시나 우유를 나눠 마신 모두가 탈이 났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 내일은 신선한 우유를 마시겠다고 다짐했지만, 불행히 이번에도 냉장고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밖에 없었다.

이제는 고민이 된다.

이 우유를 굳이 마셔서 결과가 뻔한 상황을 다시 겪을지, 아니면 우유가 아닌 다른 음료수를 찾아 마실지.

그런데 다른 음료수를 찾는 일이 쉽지 않은 게 문제다.

그렇다고 또다시 유통기한이 지난 상한 우유를 마시기에는 나와 친구들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매년 요양급여비용 계약(수가협상)은 과정부터 결과까지 험난하지 않은 적이 없다.

가입자단체와 공급자단체, 그 사이에 있는 국민건강보험공단과의 줄다리기와 서로 간의 얼굴 붉힘은 흔한 일이 됐고 ‘밤샘협상’은 당연한 ‘야근’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예년과 다르지 않을까’라는 일말의 희망을 안고 시작하는 것이 수가협상이다.

2023년도 수가협상도 그렇게 시작했지만, 예상했던 데로 올해 협상 과정과 결과는 예년과 다르지 않게 험난하게 끝났다.

단, 올해 명확해진 것은 하나 있다.

몇 년간 유지한 수가협상의 구조와 방식 등 전반적인 틀 자체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 상해도 너무 상한 우유가 됐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

여태껏 겨우 버텨낸 곪고 곪은 상처가 한 번에 터져버려 폭발한 수가협상이 이번 2023년도 수가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건보공단 재정운영위원회(재정위)는 최종협상 당일 밤 9시가 넘어서야 추가소요재정(밴드)을 공식적으로 공개했고, 코로나19로 인한 손실보상 등의 문제는 수가협상이 끝날 때까지 논란이 됐으며, 밤샌 것도 모자라 6월 1일 정오 즈음에야 모든 협상 일정이 마무리돼 최종협상 결과 보도자료가 언론에 배포됐다.

또한 얼마나 답답했으면 6개 공급자단체들은 최종 수가협상 직전에 열린 제3차 재정운영위원회 소위원회 회의에 잠시 들어가 읍소(?)하는 시간을 가졌고, 앞서 공동성명서를 두 차례나 발표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 공급자단체의 수가협상단은 협상장에서 고함을 지르며 불만을 토로했고, 내년부터는 협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까지 보였다.

이처럼 2023년도 수가협상은 상견례가 열린 5월 4일 이후부터 협상 결과 보도자료가 배포된 6월 1일까지 관행대로 진행된 것보다 이례적인 일이 더 많았다.

단순히 SGR 모형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라기보다는 공급자단체, 가입자단체, 건보공단 모두에게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인 ‘수가협상’이라는 하나의 이벤트 속 과정, 방식, 형태, 수단 등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어긋나고 있음을 너무 극명하게 보여줬다.

억지로 버티고 버티던 기존 수가협상의 틀이 완벽히 망가졌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2023년도 수가협상은 끝났다. 결과를 바꿀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

하지만 2024년도 수가협상이 당장 내일 열린다는 심정으로 정부가 대안 마련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면, 다음 수가협상은 역대급 파탄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은 협상 현장에서 함께 눈을 비비며 밤샌 기자들만 느낀 감정은 아닐 것이다.

유통기한이 지나 상한 우유인 것을 알면서 친구들과 나눠 마시는 것은 이제 너무 멍청한 짓이다.

만약 멍청한 짓인 것을 모두가 깨달았다면, ‘내년 되면 어떻게든 또 되겠지(배탈 한번 또 나면 되겠지)’라는 마음가짐을 버리고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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