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진료거부, 법률의 명시 선행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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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진료거부, 법률의 명시 선행돼야
  • 병원신문
  • 승인 2019.02.2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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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 세브란스병원 법무팀 변호사
지난해 발생한 한 대학병원 정신과 교수 피살 사건 이후, 국회에는 의료법 개정과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안이 10여 건 넘게 발의된 상태다. 특히 진료실 내 의료인 폭행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 제정 논의가 탄력을 받고 있으며, 의료계에서는 제한적으로 진료거부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현재 의료법은 ‘의료인 또는 의료기관 개설자는 진료나 조산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 한다’고 진료거부금지의무를 규정하고 있다(의료법 제15조 제1항). 법원은 ‘진료’를 ‘질병의 예방이나 치료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의학적 전문지식을 기초로 하는 진찰, 검안, 처방, 투약 또는 외과수술 등의 경험적·기능적 행위’로 정의하고 있어 사실상 의료인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위 진료거부금지의무상의 진료행위에 포함하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진료행위를 거부할 수 있는 사유에 해당하는 ‘정당한 이유’가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즉, 의료인으로서는 실무상 진료 중 마주친 상황이 진료거부금지의무의 예외사항인 ‘정당한 이유’에 해당하여 진료거부를 할 수 있는 상황인지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려워 실질적으로 진료를 거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진료거부의 ‘정당한 이유’에 대한 판례를 보자. 법원은 의사가 계류유산 의증이 있는 환자에게 낙태수술을 하기로 하고 수술 준비를 위하여 자궁에 카테터를 넣어 두었으나 의료보험문제로 시비가 있어 다음날 진료를 거부하여 환자가 다른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은 사건에서, 의사의 진료거부에 정당한 이유가 없다고 하여 진료거부로 인한 의료법 위반을 인정한 바 있다(서울형사지방법원 1981. 7. 2. 선고 80노8696판결). 즉, 의사가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는 등의 개인적인 감정을 이유로 진료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정당한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반면 환자의 치료에 필요한 설비 및 지리적 요인 등 여러가지 사정으로 진단에 필요한 검사를 실시할 수 없는 경우 환자에게 전원을 권고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판례도 있다(대법원 1998. 2. 27 선고 97다38442 판결). 구체적으로 법원은 의사가 환자나 가족에게 조직괴사 등에 대해 필요한 검사나 치료를 할 수 있는 병원으로는 종합병원밖에 없다고 설명하면서 종합병원으로 전원할 것을 권유하였다면 그것으로 의사로서의 진료상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거기서 나아가 환자나 가족들이 개인의원으로 전원하는 것을 만류, 제지하거나 그 환자를 직접 종합병원으로 전원하여야 할 의무까지 있다고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대법원 1996. 6. 25 선고 94다13046 판결).

의료인뿐만 아니라 의료기관 종사자가 진료거부를 한 사건에 대하여 업무상과실치사를 이유로 금고 1년을 선고한 판례도 있다(서울북부지방법원 2017. 12. 22. 선고 2016고단5902 판결). 병원 응급실에 복통과 오한을 호소하며 환자가 후송되었는데, 해당 병원 원무과 직원이 접수 과정에서 해당 환자가 과거 진료비 미납 전력과 진료 시 폭력적 성향을 보였던 점을 발견하고 환자의 진료 접수를 거부하였다. 환자는 의식 불명에 빠져 3일 만에 복막염으로 숨졌다. 법원은 해당 원무과 직원은 응급실을 찾아온 환자인 피해자가 신속한 진료를 받지 못하면 사망할 수 있다는 예견이 가능했음에도, 독단적인 판단에 따라 접수를 거부하여 피해자로 하여금 의사의 진료를 받을 기회를 박탈하는 업무상 과실을 저질러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실형을 선고했다.

즉, 진료비 미납으로 인한 진료거부를 정당한 사유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만 기존 진료거부금지의무의 주체는 의료인에 한정되었으나, 2016년 법 개정으로 인해 의료기관 개설자도 포함되어, 현재는 이러한 경우 의료인이 아닌 의료기관 개설자에게도 업무상 과실치사가 아닌 의료법 위반을 적용할 여지가 있다. 

위와 같이 정당한 이유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하여는 개별 사안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고 명확한 기준이 없으므로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보건복지부의 유권해석을 많이 참고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정당한 이유’의 예로 ‘시설 및 인력이 없거나, 진료일정 때문에 불가피하거나, 환자 등이 의료인에 대하여 모욕죄·명예훼손죄·폭행죄·업무방해죄에 해당될 수 있는 상황을 형성하여 의료인이 정상적인 의료행위를 행할 수 없도록 한 경우’ 등과 같은 8개 사항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미 진료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진료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진료할 시설 및 인력이 있음에도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등의 진정한 의미의 진료 거부사유는 아니다. 즉, 해당 유권해석에 따르더라도 폭행 등이 발생한 이후에는 진료거부를 할 수 있으나, 폭행 등의 행위가 명백히 예견되는 경우에는 진료거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유권해석에 따르더라도 법원의 판단이 이와 상이할 경우에는 처벌을 받을 위험도 여전히 존재한다.

진료거부를 할 경우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뿐만 아니라(의료법 제89조 제1호),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에 따라 자격정지 1개월에 처해질 수 있다.

또한 양벌규정에 의해 소속 의료인이 진료거부를 한 경우에는 의료인 본인 외에도 해당 의료기관에 1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이 부과될 수 있다. 다만, 해당 의료기관이 진료거부 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해당 업무에 대하여 상당한 주의와 감독을 게을리하지 아니한 것을 입증한 경우에는 의료기관은 벌금형 부과를 면할 수 있다(의료법 제91조).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은 이보다 무거운 형사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즉, 응급의료종사자는 업무 중에 응급의료를 요청받거나 응급환자를 발견하면 즉시 응급의료를 하여야 하며, 정당한 사유 없이 이를 거부하거나 기피하지 못한다(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6조 제2항).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며(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60조 제3항 제1호), 이 경우에도 양벌규정에 의해 의료기관에 벌금형이 부과될 수 있으나 의료기관이 주의 감독의무를 다하였음을 증명하면 의료기관은 벌금형 부과를 면할 수 있다(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61조).

위와 같이 ‘정당한 이유’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진료거부에 해당하여 의료인은 형사 처벌뿐만 아니라 자격 정지라는 행정 처분에 처해질 수 있으므로, 의료인으로서는 환자에 대한 진료거부를 쉽게 할 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의료진이 진료거부를 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환자들은 진료거부금지의무에 대한 내용을 잘 알고 있어 의료진을 고발하겠다고 하며 이를 악용하는 경우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현재 미국은 비응급상황에서 환자의 건강상태나 질병의 악화를 초래하지 않는 한 민간의료기관의 의사가 치료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영국은 의료인에게 폭력이나 위협 등을 하는 경우 진료거부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응급상황과 인도주의적 필요가 있는 경우 외에는 전문직업적 또는 개인적인 이유로 환자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환자가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 환자가 업무방해에 해당하는 상황을 조성하는 경우, 환자가 의료인의 지시에 명백히 따르지 않는 경우’ 등을 진료 거부 사유의 예시로 법률에 규정해준다면, 의료인이 두려움 없이 진료거부를 할 수 있어 안전한 진료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환자 역시 환자로서의 권리를 넘어선 행동을 하지 못하므로 의료인과 환자 간의 관계가 개선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더 나은 진료 환경이 조성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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