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제는 빼내야 더 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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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이제는 빼내야 더 잘 보인다
  • 병원신문
  • 승인 2018.10.2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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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태린 위아카이(주) 대표이사
어느 순간부터 온갖 문구와 이슈로 가득 채워진 벽들이 익숙해졌다. 게다가 이곳저곳을 가리키는 표시는 넘쳐난다. 지하철을 타러 입구에 도착하니 여러 숫자와 글자들이 펼쳐져 있다. 지하철 입구를 표시하는 숫자만 보이는 게 못미더운지 몇 번 출구라는 문구도 붙어 있다. 그 문구를 지나쳐 한 걸음 옮기면 또 다시 숫자가 등장한다. 문구와 숫자에 이어 이제 화살표가 나타나 벽과 바닥에서 사람들이 갈 곳을 알려준다.

화살표도 밋밋한 형태가 아니다. 그 위로 형형색색의 광고까지 붙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관은 온갖 부위별 성형을 유도하는 광고이다. ‘이쁘면 다다’, ‘이쁨주의’라는 말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 한다. 심지어 ‘딸아 이젠 시집갈 수 있다.’ 등 기발하다 못해 지나친 문구까지 버젓이 실려 있다. 요란한 문구와 이미지로 뒤덮인 곳을 지나오면 때로는 피곤함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도 이런 거리를 지나치면서 공간디자인을 의뢰한 병원을 찾아갔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첫인상이 중요하듯 병원을 찾아갈 때도 나 역시 첫 번째 방문에 큰 의미를 둔다. 주차장이나 병원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경험’은 이곳의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로서는 입구에서 누구를 만나고, 또 공간이 주는 분위기 등을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상호작용하는 그 공간을 바라보면서 디자인 구상을 하기 마련이다.

간혹 찾아간 병원들 중에는 첫인상부터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곳이 있다. 병원의 이름이 적혀 있는 로고를 보면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다시 그 이름이 곳곳에 쓰여 있다. 분명 그 병원에 들어 왔는데 안에서도 쉴 새 없이 병원 이름을 봐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마치 광고가 범람하는 길거리의 혼란했던 간판들과 다를 바가 없다. 병원도 이제 상업화로 변질된 공간이 되고 말았다. 이런 의료공간을 둘러보면서 정작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내가 해야 할 일은 도무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오늘 찾아간 병원도 비슷한 형상을 띄고 있었다. 친절이 과도하게 넘쳐나는 안내판과 문구들 옆에는 이벤트를 홍보하는 입간판이 눈앞에 버티고 있다. 독감주사, 영양 케어 기타 다양한 주사로 건강을 찾자는 이벤트는 이곳이 어떤 병원인지 잠시 잊게 만든다.

이벤트에서 눈을 돌려 다른 곳을 보니 이번에도 요란하다. 병원장님의 논문상 수상을 축하하는 사진과 그 옆에 황금빛 인증마크가 금테두리로 둘러싸여 있다. 이것까지 눈에 담고 난 뒤에야 겨우 안내를 접수하러 가는 길을 가리키는 문구가 조그맣게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병원 공간을 전문으로 작업하는 직업인지라 수백 개의 병원을 다녀본 사람으로도 도무지 안내데스크를 찾기가 어렵다. 처음 이 곳을 오는 환자들을 과연 어떨까?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털어내고 이제야 내 본분을 찾아 공간을 어떻게 개선할지 찬찬히 바라봤다. 그런데 벽만 보고 있어도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건물을 처음 지었을 때 숱하게 고민했을  값비싼 대리석은 온갖 홍보물에 가려 아름다운 물결무늬는 죄다 가려져 있다.

벽을 자세히 보니 꽤 비싼 자재임에 틀림없지만, 대리석 본연의 무늬 위에 요란스러운 문구로 도배된 종이 벽보와 온갖 색깔로 띠돌림한 비닐 테이프가 가리고 있다. 그 대리석 벽은 그저 안내사항을 붙여 놓는 용도에 불과한 듯했다. 이럴 거면 왜 비싼 대리석을 썼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저 멀리 내가 만나기로 한 이 병원의 서비스 담당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반겨 주신다.

“사람들이 안내 데스크까지 찾을 때 혼란스러워요. 바로 옆에 있는 대형병원과 경쟁을 하는 데 차별화가 되는 방향이 무엇일까요?”

결국 이 분들의 고민거리 역시 내가 병원을 보았던 첫인상에 대한 혼란스러움이었던 것이다. 홍보서비스 담당자로서는 하나라도 더 소식을 알려 다른 병원들과는 차별화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으리라. 그렇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다 떼어 보세요. 그럼 진짜 알리고 싶은 것들이 더 잘 보일 것입니다”라고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오히려 혼란스러워 할까 봐 가벼운 제안을 했다. 일단 작은 공간 한 곳의 배치를 정리하여 개선 전후의 모습을 비교해보자고 말이다.

독일 출신의 산업디자이너 디터 람스Dieter Rames는 ‘Less but better’라고 말하며 그 제목의 책도 기술했다. 그의 말대로 번잡스러운 것을 걷어내면 오히려 담백한 공간의 본질이 드러날 수 있다. 병원은 홍보의 공간이 아니라 치유의 공간이다. 이 공간의 특성이 잘 드러나고 또 효과가 발휘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홍보와 마케팅이 어디 있겠는가.

지하철역이나 거리, 건물 자체가 홍보 간판인 듯한 병원을 보면 과감히 다 덜어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더하고 보태는 것보다 빼고 덜어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가장 아쉽고 절실한 포인트만 보여준다면, 그 포인트는 오히려 더 강렬하게 공간을 찾는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형형색색으로 오감을 자극하다 못해 무뎌지게 만들어 정보 자체가 피로감을 준다. 이렇듯 정보 과잉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심신이 적어도 병원에서는 위로받아야 하지 않을까. 치유를 담당하는 병원이라는 공간만큼은 평온과 회복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승효상 건축가가 말한 채움보다 비움이 중요하다는 '빈자의 미학'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실제로 누구라도 자신의 공간을 만든다고 한다면  최소한으로 집중하여 과감히 덜어내는 것을 실천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한 집 건너 병원인 치열한 경쟁구도에서 어떻게 하면 병원의 경쟁력을 살릴 수 있느냐의 기로에 서있다면 말이다

그동안 드러냄을 강조하기 위해 이것저것을 덕지덕지 붙이는 게 최선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과감히 떼어내어 본질 그 자체를 빛내보자. 이번 프로젝트를 나는 이렇게 명명했다. ‘안내문구 없는 병원’이라고.


노태린은 사람 중심의 디자인을 추구하는 공간디자이너다. 특히 병원을 중심으로 공간디자인을 수행하면서 사람 중심, 즉 사용자 중심의 디자인이 곧 치유에 유의미한 효과를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저서로 <종합병원 리모델링>과 <종합병원 확 뜯어 고치는 여자>, <공간은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등을 출간했고, 현재 의료공간디자인전문회사 위아카이(주)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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