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공의 없는 병원엔 미래도 없다
김도훈 한국병원정책연구원 연구원
의정 사태 이후 2년 가까이 지났지만, 수련병원의 풍경은 여전히 낯설다.
전공의가 빠진 자리를 전문의와 진료지원인력(PA)이 메우고, 병원은 당장의 진료 공백을 막는 데 급급했다.
그 사이 정작 중요한 질문 하나가 뒤로 밀렸다.
지금 병원에 남아 있는, 그리고 앞으로 들어올 전공의를 ‘어떤 의사로 키울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정부는 전공의 정원을 늘리고 수련수당을 인상하는 대책을 내놓았지만, 정원을 채운다고 좋은 의사가 저절로 길러지는 것은 아니다.
정원의 숫자와 함께 수련의 질을 설계하고 뒷받침하는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는 게 필자의 진단이다.
■ 병원 현장이 감당해온 몫
지난 2년, 전공의 공백을 메운 것은 결국 병원 현장이었다.
전문의와 진료지원인력이 비상 진료체계를 지탱했고, 병원은 제한된 재정과 인력으로 수련의 틀을 지켜내려 애써왔다.
이 과정에서 지도전문의 1인당 전공의 비율의 과별 편차, 병원마다 다른 수련교육 콘텐츠의 표준화 수준, 근무시간 관리와 수련 질 관리를 뒷받침할 재정 여건 같은 구조적 과제들이 함께 드러났다.
이는 개별 병원의 노력만으로 풀기 어려운, 국가 차원의 지원과 설계가 뒤따라야 하는 문제다.
여기에 여성 전공의를 위한 육아·당직 지원, 수도권과 대형병원으로의 전공의 쏠림 문제까지 겹치면서 병원이 홀로 감당하기엔 한계가 뚜렷해졌다.
■ 대한병원협회, 문제 해결의 중심에 서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병원협회가 수련환경 관리 체계를 강화하며 문제 해결의 구심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은 의미가 크다.
병원협회가 쌓아온 현장 경험과 회원병원 간 신뢰는, 정부 주도의 일률적 규제로는 채울 수 없는 실행력을 갖고 있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병원협회의 이런 노력이 온전히 결실을 맺으려면 병원 단위의 자율적 노력을 뒷받침할 국가 차원의 재정 지원과 제도 설계가 함께 맞물려야 한다는 점이다.
병원협회가 이미 쌓아온 기반은 그 자체로 훌륭한 출발점이며, 이제 정부가 화답할 차례다.
■ 일본은 의료계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책임진다
이 지점에서 일본의 경험은 참고할 만한 설계도를 제공한다.
일본은 2004년부터 의사 면허 취득 후 2년간의 임상연수¹를 의무화했는데, 이 임상연수를 운영할 자격이 있는 병원, 즉 임상연수병원²을 후생노동성이 지도체계·증례 수 등 기준으로 심사·지정한다.
여기까지는 국가가 최소한의 틀을 관리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그 이후 단계, 즉 전문의 자격을 인증하고 수련 프로그램의 질을 표준화하는 역할은 정부가 아니라 일본전문의기구³가 맡는다.
2014년 설립된 이 기구는 정부 조직이 아니라 각 전문과목 학회와 병원단체가 함께 만든 사단법인으로, 2018년부터 신전문의제도⁴를 통해 전문과목별 수련 프로그램을 표준화하고 인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가 규제자로 군림하는 대신, 의료계 스스로 만든 전문 기구가 기준을 세우고 책임지는 구조다.
대한병원협회가 걷고 있는 길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일본은 지역 간 전공의 쏠림 문제에도 이중의 안전장치를 두고 있다.
하나는 2018년 의사법 개정으로 도도부현에 부여된 임상연수병원별 정원 배정 권한이다.
도도부현이 정원을 정할 때는 지역의료대책협의회⁵의 의견을 반드시 듣도록 법제화돼 있어, 대도시 쏠림을 억제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다른 하나는 의대 입학 단계에서부터 작동하는 지역정원⁶ 제도다.
일부 의과대학 정원 중 일정 비율을 졸업 후 일정 기간 특정 지역에서 근무하기로 약속한 학생에게 배정하는 지역할당 입학전형으로, 장학금과 연계해 지역 정착을 유도한다.
입학 단계의 지역정원과 수련 단계의 정원 배정 구조가 맞물리면서, 의사의 지역 정착을 입구부터 출구까지 설계하는 셈이다.
■ 제언: 병원의 노력에 국가가 화답해야 한다
이상을 종합해 필자가 제언하고 싶은 것은 다섯 가지다.
첫째, 지도전문의 1인당 담당 전공의 수의 적정 기준을 병원계 스스로 명문화하고, 이를 충실히 이행하는 수련병원에는 정원 배정과 재정 지원에서 우대해야 한다.
둘째, 전공의 수련교육 콘텐츠를 과목별로 표준화한 커리큘럼과 술기 인증 체계를 병원계 주도로 도입해, 어느 병원에서 수련받았든 최소한의 임상 역량을 보장해야 한다.
셋째, 병원계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수련 질 관리 체계에 정부가 실질적 권한과 재정을 함께 부여해야 한다.
넷째, 지역·필수의료 분야 수련병원에는 지도전문의 수당과 교육 인프라를 국가가 별도로 지원하고, 일본의 지역정원처럼 의대 입학 단계에서부터 지역 정착을 유도하는 제도적 장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이 모든 과정에서 정부는 규제자가 아니라 재정을 뒷받침하는 파트너로 역할을 재설정해야 한다.
전공의 인건비와 수련 비용을 병원 자체 재정에만 의존하게 하는 구조로는, 병원계가 아무리 좋은 수련 기준을 세워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 전공의가 남아야 병원도, 지역도 남는다
결국 관건은 병원계의 노력에 정부가 얼마나 실질적으로 화답하느냐다.
병원이 자율적으로 기준을 세우고 실행하더라도, 그것을 재정으로 뒷받침하는 정부의 몫이 빠지면 지속되기 어렵다.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병원계, 그 기준을 지역별로 실행하는 협의체, 그리고 이를 재정으로 뒷받침하는 정부.
이 세 축이 맞물릴 때 비로소 전공의는 값싼 노동력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의사’로 되돌아온다.
좋은 의사가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야 그 의사가 그 병원에, 그 지역에 남는다. 지금 병원계에 필요한 것은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받고, 국가의 재정적 뒷받침을 이끌어내는 일이다.
- 주석 -
1. 임상연수제도: 일본이 2004년부터 의무화한 의사 면허 취득 후 2년간의 기초 수련 제도. 한국의 인턴제도(현재는 폐지, 수련의 과정)와 유사.
2. 임상연수병원: 후생노동성이 지도체계·증례 수 등 기준을 심사해 지정하는 임상연수 인가 병원. 한국의 수련병원 지정제도와 유사.
3. 일본전문의기구: 2014년 설립된 전문의 자격 인증 표준화 기구로, 정부기관이 아닌 학회·병원단체 참여 사단법인. 한국의 대한의학회·전문과목학회 인증체계와 유사.
4. 신전문의제도: 2018년부터 일본전문의기구가 시행 중인 전문의 수련 프로그램 질 관리 제도. 한국의 전공의 수련 프로그램 인증제도와 유사.
5. 지역의료대책협의회: 도도부현이 임상연수병원별 정원을 배정할 때 의견을 듣도록 법제화된 지역 의사확보 협의기구. 한국의 전공의 정원 지역배정 협의 절차와 유사.
6. 지역정원: 졸업 후 일정 기간 특정 지역 근무를 조건으로 의대 정원 일부를 배정하는 지역할당 입학전형 · 한국의 지역인재전형과 유사하나 근무 의무가 결부된 점이 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