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특집] 지훈상 대한병원협회 명예회장 인터뷰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병원계를 하나의 선율로 만들다 응급의학 체계 구축 및 JCI 인증 등 의료 질 향상 견인 병원계 화합 및 정책단체 위상 강화…홍보 기능 중요성 강조
“병협의 주인은 회장이 아니라 회원병원입니다.”
지훈상 명예회장은 2008년 5월 제34대 대한병원협회장에 취임하던 날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병원계는 대학병원과 중소병원 간 이해관계 충돌이 적지 않았고, 저수가와 인력난, 건강보험 제도 개선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강력한 리더십을 기대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회원병원은 30병상 규모의 중소병원부터 2,000병상이 넘는 대학병원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협회장은 앞에서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를 조화롭게 만드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병원협회 회무는 그렇게 시작됐다.
■ 응급의학 불모지에 씨앗을 심다
지훈상 명예회장의 삶은 한국 의료의 개척사와 궤를 같이한다.
외과 전문의였던 그는 1970년대 말 미국 외상전문병원 연수를 통해 선진 외상진료 시스템을 접했다.
당시 국내에는 외상외과나 응급의학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다.
귀국 후 그는 응급의료체계 구축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알렸다.
1980년대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국가 차원의 응급의료시스템 구축을 제안했고, 이후 대한외상학회와 대한응급의학회 창립을 주도했다.
1997년 대한응급의학회장 재임 시절에는 응급의료 수가 현실화와 응급실 시설 현대화에 힘을 쏟았다.
"응급의료는 국가 안전망입니다.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최후의 보루가 제대로 작동해야 선진 의료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권역응급의료센터와 응급의학과 전문의 제도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선구적 노력이 있었다.
■ 세브란스의 혁신을 이끌다
의사이자 의료행정가로서의 발자취도 뚜렷하다.
그는 강남세브란스병원장과 연세대학교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을 역임하며 의료 혁신을 주도했다.
새 세브란스병원 개원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국내 최초 로봇수술 도입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특히 의료의 질 향상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연세의료원은 그의 재임 시절 국내 최초로 국제의료기관평가인 JCI 인증을 획득했다.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국제 인증을 통해 한국 의료가 세계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한국인 최초로 JCI 국제이사로 활동하며 국제무대에서도 한국 의료의 위상을 높였다.
"국제 기준은 평가를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환자 안전과 의료의 질을 높이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갈등의 한복판에서 병협을 맡다
2008년 대한병원협회장 취임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8년 만에 대학병원장이 병원협회장을 맡게 되면서 중소병원계의 우려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취임 직후 열린 시도병원회장 회의에서는 대학병원의 몸집 키우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대립보다 대화를 택했다.
“중소병원 현장을 직접 다녀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병원 규모는 다르지만 결국 국민 건강을 책임진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간호인력난 해결에 나섰다.
대한간호협회와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유휴간호사 재취업 사업을 지원했다.
병원계와 간호계가 공식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한 것은 당시로서는 의미 있는 변화였다.
중소병원의 회비 부담 완화 정책도 추진했다.
회원병원 지원을 협회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회원병원에 무한 서비스를 제공하자.”
그가 협회 직원들에게 가장 자주 했던 말이다.
■ 정책단체로서의 병협 위상 강화
지훈상 명예회장은 병원협회를 친목단체가 아닌 정책단체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외처방 약제비 환수 문제에 적극 대응했고 건강보험 수가결정체계 개선을 위해 국회 토론회를 개최하며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병원들이 제대로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병협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약분업 이후 다소 멀어졌던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원협회 간 정책협의회를 구성한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의료계 내부의 협력을 통해 더 큰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지금도 병원협회의 역할 가운데 홍보 기능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좋은 정책도 알리지 못하면 힘을 얻기 어렵습니다. 병원계가 왜 그런 목소리를 내는지 국민과 정부에 정확하게 설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또한 회원병원의 적극적인 참여도 강조했다.
“회원병원들이 협회를 믿고 회비를 내야 병원계를 위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성과가 다시 회원병원의 권익 향상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 병협 50년 역사에 미래를 담다
그의 임기 중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대한병원협회 창립 50주년 사업이다.
2009년 창립 50주년을 맞은 병원협회는 단순한 기념행사에 머물지 않았다.
‘대한병원협회 50년사’를 발간해 역사를 정리했고 대규모 학술행사를 통해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현재 사용 중인 대한병원협회 CI도 이 시기에 탄생했다.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비전 2020’ 선포였다.
‘정책 선도와 병원 선진화로 의료강국 실현.’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한국 의료의 미래를 향한 청사진이었다.
또한 그는 2007년 세계병원연맹(IHF) 서울총회 대회장을 맡아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한국 의료의 글로벌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 AI 시대, 다시 강조하는 협력의 가치
80대가 된 지금도 그는 의료계의 미래를 누구보다 깊이 고민한다.
특히 AI 시대를 병원계의 새로운 기회로 바라본다.
“지난 67년 동안 대한민국 의료는 국립대병원과 사립대병원, 그리고 전국의 크고 작은 중소병원들이 함께 성장하며 세계적인 의료강국을 만들었습니다.”
이어 그는 “AI 시대는 병원 규모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도전이자 기회”라고 말했다.
“대형병원의 연구 역량과 중소병원의 현장 대응 능력을 AI가 연결해 주는 가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서로의 차이를 경쟁이 아닌 상생의 시너지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는 인간형 로봇이 의료현장에 본격 도입될 미래도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휴머노이드는 의료진의 든든한 조력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환자의 눈을 맞추고 아픔을 공감하는 의료의 본질은 결코 로봇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첨단 기술 위에 인간적인 따뜻함이 더해질 때 진정한 미래의료가 완성된다”고 강조했다.
■ 서번트 리더십과 우공이산
지훈상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은 두 단어로 요약된다.
‘서번트 리더십’과 ‘우공이산(愚公移山)’.
그는 리더는 앞에 서서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성원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결국 길이 열린다는 우공이산의 정신을 평생 실천해 왔다.
응급의학을 개척할 때도, 병원협회를 이끌 때도, 의료제도 개선을 추진할 때도 그의 원칙은 같았다.
“당장은 불가능해 보여도 누군가는 시작해야 합니다. 작은 노력들이 모이면 결국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 “지금도 현역처럼 바쁩니다”
원로가 된 지금도 그의 일정은 빽빽하다.
강연과 자문회의 참석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웃으며 근황을 소개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바쁘게 지냅니다.”
건강관리 비결도 들려줬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등산을 합니다.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큰 행복입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다시 한번 병원계의 화합을 강조했다.
"병원은 경쟁만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협력해야 국민 건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응급의학의 개척자, 의료 혁신의 선도자, 그리고 병원계 화합을 위해 헌신한 조율자.
지훈상 명예회장이 꿈꿨던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지금도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를 향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