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특집] 작은병원의 디지털 격차, ‘추격’ 아닌 ‘우회’가 답

대한병원협회 창립 67주년 특집…AI 시대, 병원의 생존 전략 김기주 선한빛요양병원 병원장(대한병원협회 재무부위원장)

2026-07-06     병원신문
김기주 선한빛요양병원 병원장(대한병원협회 재무부위원장)

1. 두 개의 속도

올해 초 세계 최대 규모의 의료기기 전시회 WHX 두바이 전시장을 둘러보며 필자가 받은 인상은 한마디로 ‘속도의 충격’이었다.

영상 판독을 보조하는 AI, 진료 대화를 실시간으로 기록으로 옮기는 음성인식 포함 진료지원 AI(엠비언트 AI), 병동을 순회하는 물류·소독 로봇까지, 불과 몇 년 전 학회 강연에서 ‘미래’라고 소개되던 기술들이 이미 상용 제품으로 진열대에 올라 있었다.

미국의 의료 현장에서는 이 변화가 전시장을 넘어 일상 진료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시선을 국내 중소병원으로 돌리면 풍경은 완전히 달라진다.

전담 전산 인력이 한 명도 없는 병원이 드물지 않고, EMR은 십수 년 전 구조 그대로이며, 클라우드는커녕 원내 서버의 보안 관리조차 외주에 의존하는 곳이 많다.

같은 의료 제도 안에서 두 개의 전혀 다른 속도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격차가 단순한 ‘기술 격차’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AI의 도움을 받는 병원과 받지 못하는 병원 사이에는 환자 안전의 격차가 생기고, 의료진 업무 부담의 격차가 생기며, 인력난 시대에 직원을 붙잡아 둘 수 있는 근무 환경의 격차가 생긴다.

디지털 격차는 결국 병원의 의료서비스 질 격차와 병원 생존의 문제로 귀결된다.

2. 이미 와 있는 미래, 미국 EMR 현장의 AI는 무엇을 바꾸고 있나?

‘AI가 의료를 어떻게 바꾸는가’는 더 이상 전망의 영역이 아니다. 

세계 EMR 시장을 주도하는 미국 Epic은 2025년을 거치면서 AI를 EMR의 부가 기능이 아닌 핵심 엔진으로 재편하고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세 가지 흐름이 있다.

진료 대화를 자동으로 기록으로 바꾸는 ‘엠비언트(ambient) AI’, 근거를 즉시 찾아 주는 ‘AI 임상 의사결정’ 지원, 그리고 사전승인·보험서류 같은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AI 에이전트’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음성인식 솔루션과 엠비언트 청취 기술을 결합한 ‘Dragon Copilot’을 2025년 정식 출시했고, 이는 Epic의 모바일·데스크톱 환경에 직접 내장되고 있다.

의사가 환자와 자연스럽게 대화하면 AI가 수 초 만에 진료기록 초안을 생성한다.

같은 계열의 엠비언트 AI가 단 한 달 동안 600여 개 의료기관에서 300만 건 이상의 진료 대화를 처리했을 만큼 확산 속도도 빠르다.

적용 범위는 의사를 넘어 간호로 확장돼, 일부 병원은 간호사의 12시간 근무에서 차팅 시간을 약 2시간 줄였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근거 기반의 AI 임상 의사결정 지원도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의사를 위한 ChatGPT’로 불리는 ‘OpenEvidence’가 대표적인데, 신뢰할 수 있는 의학 문헌에서 근거를 끌어와 출처와 함께 답을 제시한다.

2026년 들어 미국 의사의 약 3분의 2가 사용하고 월간 2,000만 건 안팎의 임상 상담에 활용될 만큼 확산됐다.

무엇보다 이런 도구가 엠비언트 워크플로 안으로 통합돼 의사가 진료 흐름을 벗어나지 않고도 기록 작성과 최신 근거 확인을 동시에 처리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3. 효과는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한계도 분명하다

이러한 변화가 실제 의료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정량적 근거로 쌓이고 있다.

2025년 10월 JAMA Network Open에 실린 6개 의료기관 임상의 263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엠비언트 AI 스크라이브를 30일간 사용한 외래 임상의의 번아웃 비율은 51.9%에서 38.8%로 유의하게 감소했다.

진료 후 잔무 시간이 줄고, 인지적 부담이 낮아졌으며, 환자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늘었다는 결과가 함께 보고됐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임상의 AI 스크라이브 사용하자 EMR 사용 시간은 8.5%, 기록 작성 시간은 15% 이상 줄였다. 

여기서 핵심은 시간 절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시간이 환자와의 대화와 눈맞춤으로 되돌아간다는 데 있다.

연구자들은 이를 ‘의사를 다시 인간적인 임상의로 되돌리는 기술’이라고 표현했다.

다만 빛이 밝은 만큼 그림자도 분명하다.

AI가 생성한 기록에는 실제로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만들어 내는 ‘환각(hallucination)’, 중요한 정보를 빠뜨리는 누락, 발화자를 혼동하는 오류가 보고된다.

여러 엠비언트 스크라이브 플랫폼을 비교한 한 시뮬레이션 연구에서는 기록 오류율이 평균 26%에 달했다는 보고도 있다.

그래서 모든 연구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원칙이 바로 ‘인간의 최종 검토(humanin-the-loop)’다.

AI는 초안을 만들 뿐, 그 기록에 서명하고 책임지는 주체는 여전히 의료진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분명하다.

AI의 효과는 화려한 진단 혁명보다 오히려 문서화와 행정처럼 ‘의료의 본질이 아닌 노동’을 덜어주는 지점에서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나타나고 있으며, 바로 그 지점이 인력과 자본이 부족한 중소·요양병원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4. 선한빛요양병원의 실험, 감염관리와 약물조정에서 시작하다

그렇다면 빅5 병원과 같은 투자 여력이 없는 작은 요양병원에서도 이 흐름에 올라탈 수 있을까?

필자가 운영하는 선한빛요양병원은 ‘병원 전체를 한꺼번에 디지털화하겠다’는 거창한 목표 대신, 우리 병원에서 가장 부담이 큰 지점 하나를 골라 거기에 가벼운 도구를 붙여 보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흥미롭게도 그 출발점은 영상이나 로봇 같은 값비싼 장비가 아니라, 이미 상용화된 ‘보이스 EMR’과 ‘LLM 기반 AI’였다.

첫째, 보이스 EMR(엠비언트 음성기록)을 실제 진료에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회진과 진료 과정의 구두 소견을 음성으로 기록하면 초안이 자동으로 정리되고, 의료진이 검토·수정한 뒤 최종 확정한다.

와상·고령 환자가 많아 관찰 기록이 방대한 요양병원 특성상, 이 한 가지만으로도 의료진이 모니터 앞이 아니라 환자 곁에 머무는 시간이 눈에 띄게 늘었다.

미국 연구가 보여 준 ‘문서화 해방’ 효과를, 규모는 작지만 우리 현장에서도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감염관리와 항생제 선택 과정에서 LLM 기반 근거 검색의 도움을 받는다.

요양병원은 CRE·VRE·MRSA·ESBL 생성균 등 다제내성균과 흡인성 폐렴, 요로감염, 패혈증이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게 현실이다.

감수성 결과 해석, 가능한 항생제 후보군의 정리, 신기능에 따른 용량 고려 사항, 격리 지침의 확인처럼 시간이 많이 드는 정보 정리 작업에 OpenEvidence 같은 근거검색 도구와 범용 LLM을 활용한다.

AI가 최신 문헌과 가이드라인을 빠르게 모아 ‘검토할 후보와 근거’를 정리해 주면, 의료진은 그 위에서 환자의 배양·감수성 결과와 임상 경과를 종합해 실제 처방을 판단한다. 

영상의학과나 감염내과 전문의가 상주하지 않는 중소병원에서, 이는 야간·주말의 의사결정에 ‘두 번째 눈’을 더해 주는 안전망이 된다.

셋째, 다약제 복용 환자의 약물조정에도 같은 방식이 쓰인다.

요양병원 환자는 평균 10종 안팎의 약을 복용하는 경우가 흔해, 약물 상호작용과 신·간기능에 따른 용량 조정, 노인에게 잠재적으로 부적절한 약물(PIM)의 선별이 늘 과제다.

LLM 기반 도구로 상호작용 가능성과 점검 항목을 빠르게 정리해 검토의 출발점으로 삼고, 최종 처방 변경은 반드시 담당 의료진이 결정한다.

이 상의 세 가지 사례를 관통하는 원칙은 하나다.

AI는 ‘근거의 초안’을 만들 뿐, 진단과 처방의 최종 판단과 책임은 전적으로 의료진에게 있다는 것이다.

환자 정보는 철저히 비식별화해 입력하고, AI가 제시한 내용은 반드시 의료진이 검증한다.

미국의 다기관 연구가 공통으로 강조한 ‘human-in-the-loop’ 원칙을, 우리 같은 작은 병원이 오히려 더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경험이 주는 함의는 분명하다.

거대한 시스템을 새로 구축하지 않고도,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경량의 도구만으로 중소병원이 디지털 전환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격차를 줄이는 길은 대형병원의 인프라를 똑같이 따라 짓는 데 있지 않다.

우리 병원에서 가장 아픈 지점부터 가벼운 도구로 메워 나가는 ‘점진적 우회’에 있다. 

다만 개별 병원의 의지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도 분명히 존재한다.

폐쇄적인 EMR 구조 탓에 외부 솔루션 하나를 연동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이 들었고, 보안·개인정보 규제에 대응할 전문인력은 채용 시장에서 구할 수조차 없었다.

LLM 기반 AI를 사용중인 EMR에 직접 연동하지 못하다 보니 개별 환자정보를 개인정보를 제외한 채 AI에 직접 넣어야 한다. 

개별 병원의 분투가 구조의 문제를 대신할 수는 없다.

5. 격차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중소병원의 디지털 격차를 ‘경영진의 인식 부족’으로 설명하는 것은 현장을 모르는 진단이다.

격차의 뿌리는 구조에 있다.

첫째, 보상 구조다.

AI와 디지털 기술의 도입 비용은 온전히 병원의 몫이지만, 그 효과에 대한 수가 보상은 사실상 없다.

혁신의료기술 평가 등 제도가 마련되어 있으나 그 문턱을 넘는 것은 대부분 대형병원과 연계된 기술들이다. 

특히 일당정액수가 체계의 요양병원은 신기술에 투자할수록 원가만 올라가는 구조여서 투자 유인이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다.

행위별 수가제인 중소병원도 수가화 되지 않은 신기술의 도입과 확산은 부담의 증가로 확산은 더딜 수 밖에 없다.

둘째, 공급자 시장의 쏠림이다. 

미국에서 엠비언트 AI 기업들이 레퍼런스 가치가 큰 대형 의료기관에 영업과 기술 지원을 집중했던 것처럼, 국내 의료 AI 시장도 대형병원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중소병원은 협상력도, 맞춤형 지원도 갖지 못한 채 시장의 변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

셋째, 데이터 인프라다.

표준화되지 않은 데이터 위에서는 어떤 AI도 제 성능을 내지 못한다.

병원마다 제각각인 EMR 구조와 데이터 형식은 중소병원이 디지털 생태계에 합류하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근본적인 장벽이다.

6.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섯 가지 제언

첫째, 중소병원 디지털 전환 지원사업의 제도화다.

EMR 인증 획득 및 클라우드 전환, 도움되니 의료 AI 기술 도입, 보안 체계 구축 비용을 지원하는 바우처 방식의 직접 지원이 필요하다.

일본이 의료 DX 추진 과정에서 중소 의료기관의 시스템 표준화 비용을 정책적으로 지원한 사례는 좋은 참고가 된다.

둘째, 수가를 통한 보상이다.

보이스 EMR, LLM AI나 의료 vertical AI EMR 도입 등 진료의 질을 높이거나 의료업무 효율화에 도움되는 신기술은 요양병원 정액수가 체계나 행위별 수가에도 환자 안전과 직결되는 디지털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 기전이 마련돼야 한다.

셋째, 공통 플랫폼과 표준화다. 

개별 중소병원이 각자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비효율이다.

클라우드 기반의 중소병원형 표준 EMR을 육성하고, 의료 데이터 표준 적용의 로드맵을 명확히 하여 병원의 규모와 무관하게 데이터가 흐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미국의 엠비언트 AI가 Epic이라는 표준 플랫폼에 ‘내장’되며 빠르게 확산되었다는 사실은 표준화가 곧 확산의 전제임을 보여 준다.

넷째, 올해 3월 시행된 돌봄통합지원법과의 연계다.

지역 단위에서 의료·요양·돌봄 정보를 연계하는 인프라가 구축될 때, 그 정보가 실제로 만나고 흐르는 접점은 바로 지역의 중소병원과 요양병원이다. 

통합돌봄의 정보 인프라 설계에 중소병원을 주변부가 아닌 일차 파트너로 포함시켜야 하며, 이는 중소병원 디지털 전환의 강력한 견인차가 될 수 있다.

다섯째, 인력의 공유다.

병원마다 전문인력을 두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권역 단위의 의료정보 지원센터를 통해 여러 중소병원이 보안·데이터·시스템 전문 인력을 공유하는 모델을 검토할 만하다.

병원계 스스로도 협회 차원의 공동 구매, 공동 검증, 모범 사례 공유를 통해 개별 병원의 시행착오 비용을 줄여 주어야 한다.

7. 맺음말, 추격하지 말고 우회하라

중소병원이 대형병원의 디지털 전환 경로를 그대로 뒤따르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비관할 일만은 아니다. 

미국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AI가 의료에 가장 먼저 가져온 변화는 거창한 진단 혁명이 아니라 ‘문서화와 행정의 해방’이었다.

선한빛요양병원의 작은 실험이 보여주듯, 그 변화는 보이스 EMR과 LLM 같은 가벼운 도구만으로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다.

작은 병원에는 작은 병원의 무기가 있다.

의사결정이 빠르고, 조직이 가볍고, 현장과 경영 사이의 거리가 짧다.

거대한 시스템을 쌓아 올리는 대신, 가장 필요한 지점만 정확히 디지털화하는 전략, 말하자면 격차를 추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회하는 전략이 가능한 시대가 열린 것이다.

유선전화 시대를 건너뛰고 곧장 모바일로 도약한 나라들이 있었듯이, 레거시가 가벼운 중소병원이야말로 오히려 새로운 기술 위에서 빠르게 도약할 수 있다.

다만 그 도약이 가능하려면 출발선의 기울기를 바로잡는 정책이 함께 가야 한다.

디지털 전환에서 중소병원이 탈락하는 것은 개별 병원의 실패가 아니라 지역 의료 안전망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창립 67주년을 맞은 대한병원협회와 병원신문이 ‘AI·디지털 헬스 시대, 병원의 생존 전략’을 화두로 던진 것은 그래서 시의적절하다.

디지털 시대의 병원 생존 전략은 몇몇 병원의 첨단화가 아니라, 가장 작은 병원까지 함께 움직이는 생태계의 전환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