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융합으로 걸어온 삶, 범산 고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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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융합으로 걸어온 삶, 범산 고창순
  • 박현 기자
  • 승인 2012.08.09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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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 심상태 교수

지난 8월6일 우리 의학계의 거목인 범산 고창순 선생님이 타계했다. 선생님의 81년간의 삶과 학문적 업적을 되돌아본다.

선생님의 생애를 관통하는 첫 번째 키워드는 '도전'이다. 바꿔 말하면 불굴의 투지이다. 선생님은 경남 의령초등학교 재학당시 일제의 노역(勞役) 동원과 일본인 교사들의 비인간적인 횡포에 맞서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거부하다 근신처분을 당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항일의식이 높았던 것이다. 6.25전쟁 당시에는 서울의대 예과 수료가 예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의학 공부에 집중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전쟁 중에 그것도 외교관계가 없는 일본으로 밀항한 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의학을 공부하려는 투지가 대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생님은 1957년 26세의 나이에 일본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당시 대장암이라면 생존자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수술 직후 페니실린 쇼크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전진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는 말을 되뇌며 병마와 싸워 이겼다. 선생님은 그 후에도 50대 초반에 십이지장암, 60대에 간암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악착같이 싸워 암들을 퇴출시켰다.

선생님의 이러한 도전정신은 의학인생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1964년 33세에 원자력원 방사선의학연구소 실장에 취임했다. 그 후 방사선의학연구소의 실험은 대부분 한국 최초였다.

방사성동위원소를 사용해 뇌종양을 찍어 첫 보고서를 발간했다. 방사성동위원소를 사용해 환자들을 치료한 것도 전국에서 처음이었다. 당시 전국 갑상선 환자의 절반 이상이 방사선의학연구소 환자였다.

선생님은 1969년 서울의대 내과학교실 교수로 자리를 옮겨 제2대 동위원소진료실장에 취임했다. 당시 동위원소실은 밤에 많은 연구를 해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실'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다. 연구진의 이러한 열정 덕분에 한국 핵의학은 단기간 내에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핵의학 발전을 위해서는 결국 핵의학이 하나의 과로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970년대 내내 노력했다. 특히 독립학문의 탄생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서울대병원 제2부원장에 지명됐을 때 핵의학을 독자적인 진료과목으로 인정받는다는 조건을 내걸고 이를 받아들였다.

선생님은 한국 갑상선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국에 갑상선학을 도입한 이문호 선생님의 뒤를 이어 갑상선학이 한국에 뿌리내리도록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고 국제적으로 발돋움하도록 애썼다.

선생님은 1978년 젊은 나이의 부교수에 서울의대 출신도 아니면서 제2부원장에 취임했다. 병원 안팎에서 큰 기삿거리가 될 정도였다. 서울대병원 법인화와 신관 건축으로 병원 역사상 최대 격변기였던 때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일정을 소화했다. 다시 1986년부터는 제1 진료부원장을 맡아 서울대병원의 발전에 기여했다.

선생님의 생애를 관통하는 두 번째 키워드는 '융합'이다. 일본 유학시절 니시다 기타로(西田機多郞)의 철학이 유행했다. 니시다는 중간자를 강조하면서 동양과 서양의 철학을 융합하려는 시도를 한 인물이었다. 선생님은 니시다의 철학에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학제간 융합, 사람과 사람간의 화합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선생님은 융합의 정신을 실천에 옮겼다. 본래 선생님은 순화기내과의 이문호 선생님 수하에서 핵의학을 다루었고 이때 갑상선 환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런데 갑상선 문제는 전통적으로 내분비내과에서 다루는 것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순환기내과와 내분비내과측만 아니라 갑상선학회 측과 내분비학회 사이에서도 핵의학과의 독립을 둘러싸고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이때 선생님은 핵의학을 독립시키면서 과감하게 내분비내과 소속으로 옮기는 결단을 내렸다. 또한 갑상선학회를 해산학고 내분비학회에 소속되어 독립된 분과로 활동하기로 결정했다.

엄청나게 파격적인 조치였다. 갑상선학과 핵의학을 융합해서 전통적인 분과 학문을 뛰어넘어 제3의 학문을 창출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선생님은 또한 의학과 공학의 융합을 위해 대한의용생체공학회를 조직했다. 의료인 및 준의료인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의료의 질병 치료적 개념만이 아니라 윤리적 개념까지 정착시킬 수 있도록 대한의료정보학회를 조직했다.

선생님은 역사에도 관심과 조예가 깊은 인문학자였다. 서울대병원 제2부원장 시절 권이혁 당시 병원장님과 함께 대한의원 본관 동쪽 날개채 해체를 반대해 유서 깊은 건물을 지켜냈다.

학생이나 의사들이 참된 의학자를 존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사회에 봉사하는 의료를 생각하도록 만들자는 취지에서 서울대병원에 지석영 동상을 세울 것을 제안해 관철시켰다.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 설립에 힘썼고 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의 활동을 열렬히 응원했다. 의학과 역사, 의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소망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올해 초에 출간한 회고록의 에필로그에서 이런 말들을 남겼다.

“내게 찾아온 암은 나로 하여금 욕심을 버리게 해준 고마운 선물이다.” “인생은 결국 경쟁과 협력이라는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핵의학은 인류에 필요한 것이다.” “미래에는 융합학문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니 의료인들이 좀 더 마음을 열고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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