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궤도
상태바
영화 - 궤도
  • 이경철
  • 승인 2008.07.03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부분의 영화는 말로 가득 차 있다. 배우들은 대사를 따발총처럼 뱉어내고 마음 속에 담은 말을 내레이션으로 읊기도 한다. 아예 제3자가 전지적 시점으로 해설을 늘어놓는 영화도 있다.

이런 영화들에 익숙해진 관객은 재중동포 김광호 감독의 "궤도"를 보면 한동안 주파수를 맞추는 데 애를 먹을 수 있다. "궤도"의 주인공들은 통 입을 열지 않는다. 관객은 말 없는 배우들이 서 있는 텅 빈 들판에 함께 내던져진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어릴 적 사고로 두 팔을 잃은 철수(최금호)는 산나물을 캐는 것으로 연명하면서 산골 작은 집에 혼자 살고 있다. 어느 날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여자 향숙(장소연)이 나타나 그의 집에서 머물기를 청한다.

외롭고 슬픈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서려있는 습한 기운을 서로 알아차리지만 말을 할 수도, 손을 뻗을 수도 없이 몇 발짝 떨어져 서로 바라보기만 한다.

시간은 묵묵히 흘러가고 배우들은 상영시간 10분이 지나도, 1시간이 지나도 바라보기만 할 뿐 다가가지 못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는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고 TV 뉴스 내용은 달라지며 주인공들의 마음도 변화를 겪는다.

감정의 표출도 일절 생략되고 눈에 보이는 것은 때로는 가까이, 때로는 멀찍이 잡은 주인공들의 얼굴과 몸, 주변의 자연 환경 뿐이지만 배우들의 눈빛과 표정이 서서히 변하는 것을 잡아내는 관객이라면 소리 없는 이들의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배우들 사이의 빈 공간을 흘러가는 주변의 소리도 듣게된다. 흙을 사각사각 밟는 발 소리나 풀 벌레 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 등이다.

어릴 때 전기누선 사고로 두 팔을 잃은 재중동포 최금호가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연기를 보여주며 "고양이를 부탁해", "욕망", "내부순환선"에 출연했던 장소연도 기억에 남는 연기를 선보인다.

김광호 감독은 옌볜 TV방송국의 촬영기사이자 프로듀서 출신으로 이 영화가 장편 연출 데뷔작이다. "망종"의 장률 감독, "우리 학교"의 고영재 PD가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궤도"는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돼 뉴커런츠상을 받은 뒤 올해 네덜란드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스페인 바르셀로나 아시안영화제, 영국 에든버러 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받았다.

11일부터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만날 수 있다. 12세 이상 관람가.
<연합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