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시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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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시인을 만나다”
  • 최관식 기자
  • 승인 2020.02.03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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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몇 편의 시 수록한 간호사 시인 한상순 경희의료원 간호팀장

<간호사>

로봇이

간호사가 되고 싶어 병원에 왔어.

사람이 시키는 일은 자신 있었거든.

친구 중에는 유명한 의사도 몇 있었지.

그 친구들도 어렵지 않다고 응원을 했어.

혈압재고 체온재고 주사놓고......

시키는 일은 뭐든 척척 해냈지.

 

그런데 말이야,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얼굴만 봐도 뭘 바라는지

환자가 말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채는

그 마음

그게 뭔지 도통 모르겠는거야.

 

이런 마음을

단번에 눈치 챈 간호사

로봇 등을 토닥였어.


 

한상순 시인(외래간호팀장)
한상순 시인(외래간호팀장)

초등학교 교과서에 자신의 시를 몇 편씩이나 수록한 동시(童詩) 시인이 국내 한 대학병원에서 환자들을 직접 돌보는 현직 간호사로 활동하고 있어 병원신문이 그를 직접 만나봤다.

지난 40년간 경희의료원에서 간호사로 활동하며 환자들을 보살펴온 한상순 경희의료원 간호본부 외래간호팀장이 그 주인공이다.

한상순 팀장은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교과서에 ‘좀좀좀좀’이란 시를, 5학년 2학기엔 ‘기계를 더 믿어요’란 시를 각각 수록한 교과서 시인이다. 또 제26회 ‘한국아동문학상’과 제8회 ‘우리나라 좋은 동시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간 동시집 ‘예쁜 이름표 하나’ ‘갖고 싶은 비밀번호’ ‘병원에 온 비둘기’ ‘뻥튀기는 속상해’ ‘딱따구리 학교’ 등을 발간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를 만나기 전 ‘시인 간호사의 손길을 거쳐간 환자들은 얼마나 뿌듯했을까?’ 상상했지만 막상 만나보니 시인이라는 명찰이 따로 있을 리도 만무한 데다 그저 선한 인상에 편안한 느낌을 주는 여느 간호사들과 다를 바 없어 오히려 놀랐다.

한상순 시인, 또는 한상순 간호팀장은 여고시절 꿈이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글을 쓰는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막상 간호사가 된 후 병원과 집 사이를 반복해서 오가는 생활을 하다 좀 더 재미있게 간호사로 일을 할 수 없을까 고민 끝에 여가 때 쓰고 싶었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또 체계적인 글쓰기를 위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문법 등 기본 소양을 갖췄고, 시를 좋아하는 데다 어린이들과 심성이 잘 맞아 본격적으로 동시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한상순 팀장이 발간했던 시집들.
한상순 팀장이 발간했던 시집들.

한 팀장은 “동시는 맑고 쉬운 언어로 쓰여지지만 깊은 감동이 있다”며 “특히 간호사로서 아이들이 병원을 무섭고 두려운 곳으로 여기기보다 따뜻하고 친근감이 있는 곳으로 느낄 수 있도록 동시를 통해 인식을 바꾸고 싶다는 책임감이 병원과 관련된 시를 많이 쓰게 된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2021년 초 정년을 앞두고 병원과 관련한 동시집을 내야되겠다는 생각에 지난해 여름부터 병원 관련 동시를 쓰기 시작해 지금은 편집을 거의 마무리하고 조만간 서점가에 배포될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한 팀장은 “병원은 탄생과 죽음이 함께 있는 공간”이라며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삶과 죽음은 백짓장 한 장 차이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이를 시로 담담하게 표현했다”고 말했다.

그 대표적인 시가 ‘마지막 문자메시지’다. 이 시는 금방 숨을 거둔 분의 휴대전화로 지인의 문자메시지가 전송된 상황 묘사를 통해 삶과 죽음이 거의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시각 혹은 생각이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런 독특한 시각이 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당연한 일상도 간호사 시인의 시야에 포착되면 멋진 시로 탈바꿈하는 기적은 바로 ‘시각’ 차이라는 것.

한상순 팀장은 “처음에는 허전해서 글을 썼지만 막상 간호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꾸준하게 글을 쓰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며 “처음 임상현장에 나갔을 때만 하더라도 소명의식 같은 게 불분명했었는데 글을 쓰면서부터 간호사가 곧 나의 소명이고 길이라는 강한 신념을 갖게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만약 글을 안 썼더라면 간호사로서의 길도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라며 “간호사라는 직업과 글이라는 어릴 적부터의 꿈이 합쳐짐으로써 지금까지 그 둘이 서로 지탱해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덧붙였다.

한상순 팀장은 신졸 간호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있느냐는 질문에 “집과 병원 사이만 반복해서 오르내릴 경우 세월이 흐른 뒤에 너무 허망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며 “평소 좋아했던 걸 떠올리며 늘 함께 한다면 둘 다 잘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40여 년 전과 비교할 때 시대가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간호사는 직업이라기보다는 소명감이 더 크게 작용하는 직군이라는 게 한 팀장의 시각이다.

따라서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직업으로 여기고 간호사 일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만큼 아픈 이들 곁에서 그들을 지킨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일을 한다면 보람과 성취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특히 동료의식도 간호사 세계에서는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비록 자신이 힘들어도 동료들을 위해 더 힘을 낸다면 그 과정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더 깊은 깨달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상순 팀장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앞으로 ‘병원인’ 범주에 ‘시인’도 포함시켜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살짝 해봤다. 시인이 독자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듯, 병원에 들르지 않았다면 일면식도 없었을 환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에 늘 공감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의료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등단’하지 않은 시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인터뷰를 진행 중인 한상순 팀장.
인터뷰를 진행 중인 한상순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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