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병원협회 창립 60주년 발자취<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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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병원협회 창립 60주년 발자취<6>
  • 오민호 기자
  • 승인 2019.06.24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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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보험제도 실시로 인한 정부와의 갈등
사회· 경제적인 발전으로 의료보험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의료보험법의 전면 개정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다. 1976년 9월13일에 발표된 ‘국민보건향상을 위한 의료시혜 확대방안’에 의해 의료보험은 당연적용대상과 임의적용대상으로 구분해 실시됐다. 이를 내용으로 그 해 말까지 의료보험법을 개정하게 됐다. 그리고 1976년 3월16일 보사부는 의료보험제도 실시에 대비해 보험진료수가안을 제출하도록 의료계에 요구했다.

이런 요구에 대해 의료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대한병원협회는 보험 실시에 소극적이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국의 경제성장이 의료보험 비용을 부담하기에는 미흡하고, 따라서 정부 보조 없이 피고용인과 기업주만의 부담으로 의료보험을 무리하게 실시하게 되면 결국 보험수가가 낮게 책정될 것이 명약관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다시 말해 ‘경제적 필요가 아닌 정치적 필요에 의한 의료보험 실시’는 그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대한병원협회를 비롯한 의료계 전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7년 7월1일 전국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의료보험이 전격 실시됐다. 이에 앞서 대한병원협회는 회장단의 진퇴를 걸고 의료보험 실시를 반대하는 입장을 관철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지만 일방적으로 결정된 정부안이 고시됐다. 대한병원협회는 적정 수준 이하의 진료수가가 병원들의 경영에 심대한
영향을 주게 될 것임을 지적한 뒤 송호성 회장을 비롯한 임원 전원이 일괄 사퇴했다. 의료보험이 처음 거론된 것은 훨씬 이전의 일이었지만 1976년 3월16일 보건사회부가 의료보험 실시에 대비한 보험진료수가안을 제출하도록 의료계에 요구하면서 이 문제가 의료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대한병원협회는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했을 때 예견되는 부작용으로 첫째 환자의 폭주, 특히 대학병원 등 대형종합병원으로 환자가 집중된다는 점을 꼽았다. 둘째 의사 1인당 처리할 수 있는 환자수를 넘는 업무량 과중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환자를 대강 진료할 수밖에 없어 진료의 정확성 결여와 더불어 환자들로부터 불만과 불신이 야기되고, 의사의 연구시간이 제약을 받아 의료의 질이 낮아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진료와 검사비가 저렴해져 환자들에게 필요치 않은 과다한 검사와 투약을 요구하게 됨으로써 진료비 지출이 증가하게 되고, 이를 거절했을 때 환자와 의료기관 간의 마찰이 불가피하게 될 것도 우려했다. 대한병원협회는 원가에 미달하는 보험수가의 결손 부분을 일반환자에게서 보충해야 하는 즉, 보험환자보다도 수입이 낮은 일반환자에게서 보험수가의 결손분을 채워야 하는 역기능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실제로 의료보험은 처음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되지 못하고 근로자 500인 이상의 사업장 즉, 비교적 수입이 안정되어 있는 계층을 대상으로 실시됐기 때문에 비교적 수입이 좋은 보험환자의 진료비 결손부분을 수입이 낮은 계층인 일반환자들이 보충해 주는 역리현상 발생이 우려됐다. 그 뿐만 아니라 의료원가에 미달되는 의료보험수가체제로 제도가 시작되면서 병원의 수지는 악화되고, 그 영향으로 병원들이 재투자를 하지 못해 의료수준이 저하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대한병원협회의 이 같은 예측은 어느 정도 들어맞아 의료보험이 향후 의료계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러나 정부가 의료보험제도 시행의지를 확고히 하고 있어 당시 대한병원협회로서는 마지못해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대한병원협회는 비록 보건사회부의 의료보험제도 시행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긴 했지만 보사부·재무부·의료단체·생산성본부·보건개발연구원·한국개발연구원 등 관련 기관의 대표들로 구성된 합동연구위원회에 참여해 나름대로 진료수가의 적정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76년 10원14일, 보사부가 의료보험수가 점수표를 만들기 위한 작업반을 구성하고 11월5일에는 일본에 합동조사단을 파견했다. 대한병원협회는 합동조사단이 가지고 온 수가점수제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급기야 1977년 1월4일에 이를 주요 골자로 한 단독 건의안을 보사부에 제출했다. 이어 4월11일 보사부는 의료계 대표 7명과 공익대표 2명 등 모두 9명으로 된 의료수가제정 조정위원회를 구성한 뒤 의료보험제도 시행 직전인 6월8일 수가기준 및 의료급여기준을 고시한 뒤 7월1일 보험제도 실시를 단행했다.

이때 대한병원협회 집행부는 일방적으로 결정 고시된 정부안이 병원경영에 타격을 줄 적정수준 이하의 수가임을 지적하고 회장단과 임원 전원이 사되하는 동시에 1977년 7월22일 임시총회를 열어 새로운 집행부로 하여금 의료보험수가 기준의 적정화를 기하도록 촉구했다. 의료보험제도 실시에 대해 대한병원협회는 물론 의학협회 또한 격렬히 반대했지만 양 단체의 노력은 거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일방적으로 이 제도가 강행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의료보험 시행의 속사정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되기 몇 달 전인 1977년 4월22일 앰배서더 호텔에서 열린 대한병원협회 제18차 정기총회에서의 정부 측 인사의 발언과 1986년 4월 창간한 병원회보(후에 병원신문)가 1977년 당시 신현확 보사부 장관을 인터뷰한 내용에서 의료보험 시행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의료보험이 실시되기 전 병원계가 제도시행에 따른 부작용의 가능성을 들어 반대하자 정부 측 인사로 나온 한 대학교수가 “안보적 차원에서라도 병원계가 의료보험제도 실시를 반대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 있던 병원장들이 “어째서 의료보험제도 실시가 안보적 차원에서 실시되야 하느냐”고 되묻자 그 교수는 자신이 세계보건기구(WHO) 회의에 갔을 때 회의에 참석한 북한대표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 남한에서 발행한 D신문에 입원보증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은 환자에 대한 기사가 실렸고 또 T방송에서는 수술보증금이 없어서 수술을 받지 못하고 죽은 환자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이런 점을 보더라도 북한이 남한을 해방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다며 “그것이 바로 안보적 차원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강행된 의료보험제도는 의료계가 우려했던 대로 여러 가지 부작용을 유발하고, 의료수준의 향상을 지연시켰으며, 오늘날 상당수의 의료기관들이 경영난을 겪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1986년 병원회보의 창간 특집 인터뷰에서 1977년 당시 보사부 장관을 지낸 신현확 씨는 의료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의료보험수가는 당시 관행수가의 60% 선에서 정해졌다. 그때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정치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적당한 시기를 보아 낮게 책정된 보험수가를 정상화할 계획이었지만 그 전에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여의치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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