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의 상 받는 것 같아 불편 남은 여생 병원계 발전에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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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의 상 받는 것 같아 불편 남은 여생 병원계 발전에 헌신"
  • 박현 기자
  • 승인 2015.04.22 1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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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태 대림성모병원 이사장
‘종근당 존경받는 병원인상 CEO 부문’ 수상
세계 병원대통령으로 불리는 국제병원연맹(IHF) 김광태 회장(대림성모병원 이사장)이 제5회 종근당 존경받는 병원인상 CEO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김 회장은 “나보다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는 훌륭한 후배 병원경영자들이 받아야 하는 상을 받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어 이왕 상을 받게 됐으니 앞으로 여생을 한국 병원계 발전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그를 만나 지금까지의 삶과 병원계 발전을 위한 활약상 등에 대해 들어 보도록 한다.

 

세계 병원계 수장(병원대통령)에 선출되다

지난 2011년 6월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 병원계가 깜짝 놀라는 일이 일어났다.

동양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전 세계 병원계를 대표하는 국제병원연맹(IHF) 회장에 김광태 대림성모병원 이사장이 당선된 것이다.

아직도 많은 세계인들은 대한민국을 6.25를 겪은 가난한 나라에서 한강의 기적,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한 그저 그런 개발도상국쯤으로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김광태 이사장의 IHF 회장 당선은 세계 병원계를 깜짝 놀라게 하고도 남았다.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세계 병원대통령이 탄생했다며 대서특필하기도 했었다.

그러한 김 회장을 만나본 사람을 두 번 더 놀란다.

50여 년을 환자진료에 몸담으며 대한병원협회장, 아시아병원연맹 회장, 로타리 국제이사 등 의료계와 사회봉사 분야에서 활동해 온 김 회장이지만 경력에 비해 5척이 조금 넘는 단신에 마음씨 좋은 촌로(村老) 같은 첫 모습에 놀라고 그와 만난 후에는 팔순(八旬)임에도 그의 정열과 열정에 매료되어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이 세계 병원대통령이 되도록 한 원동력

어린 시절 김광태 회장은 유복하지 못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1937년 1월 충남 온양에서 4남5녀 중 3남으로 출생한 김 회장은 그 해 서울 영등포로 이사해 서울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일제강점기였던 유년시절을 보낸 김 회장 가족은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이 그랬듯이 하루 세끼 먹을 것이 넉넉지 않아 감자에 쌀과 보리가 약간 섞인 감자밥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아마도 김 회장이 지금껏 보여주는 근검절약 정신과 강인한 추진력은 일제강점기 유년시절을 겪으면서 생겨나 그의 몸과 마음에 배어서일 것이다.

김 회장은 1955년 성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톨릭의대에 진학해 의학도의 길로 삶의 방향을 정했다.

김 회장은 부모님을 추억하며 가장 많이 기억나는 것이 부친은 항상 남을 돕는 분이셨고 중학교 시절 모친이 폐결핵으로 고통을 겪자 자신이 모친의 병을 꼭 고쳐드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의학도의 길로 접어들었다.

모친이 세상을 뜨고 학창시절을 큰 형님 댁에서 보낸 김 회장은 오늘보다 내일의 생활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형님을 통해 평생 일을 소명으로 삼는 생활 자세를 배우고 익혔다. 1955년 고3때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없게 되자 재수를 결심했지만 형님과 누님의 강력한 권유로 가톨릭의대에 진학하게 됐다.

김 회장은 돌이켜 보면 당시 형님과 누님의 권유를 들은 것이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 잘될 수 있는 확률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순간적인 도전보다 끊임없는 도전이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고 회고한다.

이 끝없는 도전정신이 마침내 세계 병원대통령인 국제병원연맹(IHF) 회장을 거머쥐는 원동력이 됐다.

 

평생의 반려자 변주선 여사를 만나다

김 회장은 의대를 졸업하고 국군수도병원 외과 수련의 시절 평생 반려자인 변주선 여사를 만났다.

김 회장은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성격인 반면 변주선 여사는 모든 일을 신속하게 결정하고 추진하는 타고난 장점을 지니고 있다.

김 회장 부부는 거의 매일 자신들이 겪은 일이나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대화하고 의견을 나누는 등 모든 일을 가족과 상의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다 보니 아내와 결정하는 일에 대해 대부분 같은 가치관을 가지게 되어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됐다고 술회한다.

김 회장은 오늘의 병원이 있기까지 훌륭한 동업자인 아내의 탁월한 판단력이 병원을 운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어린 시절 부친의 가르침으로 남을 위하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는 일은 삼가는 마음이 깊고 따뜻한, 그리고 ‘달리 자신을 드러내려 가슴에 꽃을 달지 않는 의인’….

그를 만나면 더없이 편안하고 행복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만큼 김광태 회장은 자신에게 철저하면서도 환자와 지인에게는 자상하고 따뜻한 박애정신이 투철한 의사라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의료 불모지에 병원을 설립하다

김 회장은 1960년대 말 의사로서의 투철한 사명감과 지역주민의 건강과 인간다운 삶을 돕겠다는 일념만으로 당시 의료 불모지였던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동에 개원해 40여 년을 한 장소에서 의술을 펼치고 있다.

대림성모병원은 개원당시 20개 병상이 이제는 300여 병상으로 최고수준의 의료진과 시설 및 장비를 갖춘 종합병원으로 인턴·레지던트를 수련하는 교육병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올해 46년째를 맞은 대림성모병원은 센터중심의 종합병원으로 김 회장 자신이 외과 전문의인 만큼 갑상선센터와 유방센터 등 외과 분야와 소화기내시경센터 등의 센터를 중심으로 전문적인 진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갑상선센터는 2015년 현재 갑상선암 수술 5천500례를 기록하는 등 세계적인 전문센터로 명성을 쌓고 있다. 지난 2005년 불모지나 다름없던 갑상선 고주파열치료 영역을 선도해 갑상선 고주파의 의료신기술 선정에 기여한 바 있다.

또한 평생 참 의료인의 길을 걷고 있는 부친의 모습을 보고 의사의 길을 택한 장남이 올해 3월초 유방센터 센터장으로 취임해 유방센터를 책임지고 있다.

김 회장의 장남인 김성원 대림성모병원 의무원장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외과 부교수를 지냈다. 그는 국내 외과의사로서는 최초로 대한의학유전학회에서 임상유전학 인증의를 획득한 유전성유방암의 권위자이다.

 

가족 모두가 병원계에 종사

의사는 자기가 전공한 과로 일평생을 살아가고 그에 따라 성격, 판단, 결심, 가치관도 결정된다. 김 회장은 수술실에서 집도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김 회장은 대체로 머리가 좋은 외과의사가 수술한 환자보다 성실하게 환자와 함께하는 자상한 외과의사의 환자들이 통계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요즈음 대부분 의사들이 외과 수련의를 기피해 인기 없는 과가 됐다고 하지만 외과처럼 모든 과와 연결된 중요한 과도 없다고 재삼 강조한다.

김 회장의 가족은 모두 병원계에 종사하고 있다.

오늘의 김 회장이 있기까지 내조를 아끼지 않은 아내 변주선 여사(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는 연세대학교에서 병영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아 병원 행정원장으로 병원살림을 도맡아 왔다.

또 한국걸스카우트 총재, 세계걸스카우트 아태지역 의장, 한국아동단체협의회장 등으로 밤낮없이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장남 김성원(전 분당서울대병원 외과 교수)은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분당서울대병원 유방센터장을 역임한 우리나라 유전성유방암의 권위자로 현재는 대림성모병원 의무원장으로 김 회장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장녀(김상임, 구로다나병원 행정원장)와 차녀(김정화, St.Mary’s Eye & Surgery센터 행정원장) 모두 병원경영자로 일하고 있으며 사위(큰 사위 이성원-삼성서울병원 비뇨기과 교수, 작은 사위 김용석-St.Mary’s Eye & Surgery센터 병원장)들도 모두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국제병원연맹총회 한국 유치 및 병원협회 법정단체 추진 기억에 남아

김광태 회장은 병원협회 회장 재임 당시 국제병원연맹 총회를 우리나라에 유치했다.

김 회장이 국제병원연맹 총회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은 회장취임 직후부터 시작됐으며 20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병원연맹 총회 때부터 유치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 회장은 이때 협회 임원진인 병원장들을 대동하고 참석해 외국 참가자들에게 우리나라의 국제병원연맹 총회 개최의 당위성을 역설했고 이러한 활동 바탕으로 그 다음 해 두바이에서 열린 지역회의에서 개최를 확정지을 수 있었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 병원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실효성 있게 개선하고 해결해 나가려면 이들 분야를 다루는 전문 인력의 양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 의료수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는 병원관리 기법을 개발하고 교육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의료정책을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전문 인력의 양성을 강조했다.

국제병원연맹 총회 유치 등 국제적인 활동을 통해 외국의 선진화된 노하우를 벤치마킹 하는 것이 우리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김 회장은 병원협회가 법정단체로 거듭난 일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쾌거였다고 회상한다. 병원협회 자체의 위상은 둘째치고라도 회원병원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병원협회는 법정단체화를 서둘렀고 마침내 이를 성사시킨 것이다.

김 회장은 2007년 11월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국제병원연맹 총회 조직위원장을 맡아 역대 그 어느 행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 행사와 함께 열린 아시아병원연맹 이사회에서 차기회장에 선출되어 2009년 11월까지 회장 직무를 훌륭히 수행해 냈다.

김 회장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꾸준히 봉사활동을 실천하고 있다. 로터리클럽 회원으로 오랜 세월 봉사해온 김 회장은 로타리를 통한 사회봉사와 장학사업 등 남을 돕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는다.

김 회장은 의업에 대한 애착만큼 직업을 이용해 가지고 있는 지식을 통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매우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한다. 봉사가 몸에 밴 것이다.

김 회장은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국제로타리 이사로 활동했다. 국제로타리클럽 3640지구 총재로 추대되어 회원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골든 센츄리상’을 수상했으며 1998년 보건의 날에는 무궁화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경영철학은 지휘체계를 수평으로, 병원직원을 한 가족처럼

김광태 회장은 요즘도 아침 6시30분이면 병원에 출근한다. 눈을 뜨자마자 병원 일을 연구하는 김 회장은 병원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가장 중시한다. 진료, 교육, 연구 등도 중요시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조직체로서 힘을 가질 때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는 개원 이후 병원시설을 꾸준히 늘려왔으며 그에 따른 의료장비를 보강해왔다. 병원이 커지면서 나타날 수 있는 경직되고 사무적인 업무태도를 경계해 병원직원들이 서로 한 가족처럼 느낄 수 있도록 매월조회 때마다 특히 인성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

김 회장의 병원경영 원칙은 첫째, 모든 지휘체계를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두어 의사결정이 중간관리자 선에서 이루어지게 하며 둘째, 직원의 잠재력과 창의력을 키워주고 의사가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최선의 여건을 제공하는데 두고 있다.

이러한 김 회장의 경영철학에 힘입어 병원은 성장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점차 어려워지는 중소병원의 경영환경에도 불구하고 김 회장은 병원경영으로 발생한 수익을 환자를 위한 재투자는 물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는 노력을 계속하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

이처럼 정도경영을 견지해 온 결과로 2회에 걸쳐 모범납세자 표창을 수상하는 등 참 의료인으로서 모범이 되고 있다.

<박현·hyun@kh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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