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위로하려다 술독에 빠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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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위로하려다 술독에 빠질라
  • 박현 기자
  • 승인 2015.01.27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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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전된 심신 달래다가 알코올 의존으로 발전할 수 있어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할 생각을 하면 미치겠어요. 가끔은 그냥 눈뜨지 않았으면 싶을 때가 많아요. 제가 스스로 회사를 그만둘 자신은 없으니까 사고나 피치 못할 상황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못 가는 상황을 상상하곤 해요.”

10년차 직장인 최ㅇㅇ(41) 씨의 이야기다. 최 씨는 원래 적극적인 성격으로 입사 후 만족스러운 직장 생활을 했다.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회식에도 빠지지 않는 등 매사 열정적인 태도와 탁월한 업무 성과 덕분에 회사 경영자의 눈에 띄어 빠른 승진을 하며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랬던 그에게 갑자기 슬럼프가 찾아왔다.

최 씨는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밖에 남지 않았더라고요. 모든 게 성과로 연결되고 새로운 업무를 맡아도 예전같이 개인적인 성취감을 느끼거나 의지를 갖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갑자기 쉬지 않고 너무 일만 해왔다는 생각에 '나는 누구일까? 여기는 어디일까?'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되더라고요”라고 했다.

그리고는 “특별한 해결책을 찾지 못해 그냥 술 마시고 취하고 잠들고 다시 출근하고 그렇게 지낸지 몇 년 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최 씨처럼 출근하기 싫고 일에 대한 성취감을 잃은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이처럼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신체적·정신적인 에너지가 모두 소진돼 일을 비롯한 일상생활에서 의욕을 잃어버리는 증상을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한다.

번아웃 증후군은 번아웃(burnout)이라는 용어처럼 연료가 다 타버린 것과 같이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의욕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를 의미한다. 특히 과도한 업무와 매일 야근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에게 많이 나타나 '직장인 번아웃 증후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번아웃 증후군에 빠지면 잠을 잘 못 자거나 또는 자꾸만 졸리는 것과 같은 수면 장애부터 의욕이나 성취감 저하, 심리적 회피, 심하면 우울증에 노출된다. 흔히 번아웃 증후군에 빠지면 무작정 잠을 잔다거나 소진된 마음의 허기를 과식이나 과음으로 달래는 경우가 많다.

번아웃 증후군, 회피하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한 취업포털사이트에서 남녀 직장인 420명을 대상으로 번아웃 증후군을 극복하는 자신만의 방법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34%(142명)가 잠을 선택했으며 21%(88명)가 술, 담배와 같은 기호식품에 의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 지정 알코올 질환 전문 다사랑중앙병원 허성태 원장은 “우리 뇌는 반복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며 “직장 생활과 같은 일상적 스트레스를 잠이나 술, 담배로 해결하려는 태도 역시 이러한 회피 본능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흔히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회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스트레스 상황을 만나도 또다시 피하거나 미루려고 한다. 단시간 내에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고 편하고 익숙해져서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결국 소진된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몸만 상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다.

방전된 마음을 술로 달래다가 의존증으로까지

다사랑중앙병원 입원 환자들에게서 번아웃 증후군은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증상 중 하나다. 특히 직장인 환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데 이들 대부분은 번아웃 증후군을 술로 달래다가 결국 알코올 의존증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다.

20~30대 초년 직장인의 경우 과도한 목표 설정이나 주변의 기대로 인해 스스로를 다그치며 쉼 없이 달리다가 번아웃 증후군에 노출됐다. 반면 40~50대 직장인은 오랜 근무와 반복된 일상에 지쳐 번아웃 증후군에 노출된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번아웃 증후군을 음주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술의 알코올 성분은 뇌의 쾌락 중추를 자극해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의 분비를 활성화시킨다. 또 뇌하수체를 자극해 엔도르핀의 분비를 촉진시키는데 술을 마시고 난 후 기분이 좋아지고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허성태 원장은 “술을 마시면 당장의 고통과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 같고 기운도 상승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는 절대 아니다”라며 “번아웃 증후군으로 정신 에너지가 방전된 상태에서 음주를 하면 신체 에너지까지 방전되면서 오히려 번아웃에 번아웃이 더해지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만성적으로 심신이 지쳐 있는 상태에서 음주를 하게 되면 피로를 제대로 풀지 못해 인체 면역 기능을 떨어지게 되고 그 결과 다른 질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요즘과 같은 추운 겨울에는 자연스레 신체활동이 줄어들면서 신진대사 저하로 면역력이 감소하는 시기이므로 더욱 조심해야 한다.

남성이 술과 담배, 과도한 운동 등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반해 여성은 조금 다른 행태를 보인다. 음주나 흡연 외에도 커피를 마시거나 쇼핑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미 유통가에는 번아웃 쇼핑(직장과 학업, 사회적 갈등에 느끼는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극복하는 현상)이라는 용어까지 생길 정도다.

문제는 이러한 방법들로는 번아웃 증후군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해소방법을 반복하다 보면 나날이 심해져 과다수면증, 과식, 과음 등의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

잠을 충분히 잤는데도 계속 졸리거나 배가 불러도 계속 해서 음식을 먹는 경우, 또 술에 취한 걸 알면서도 계속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결국 자책감을 느끼는 행동 역시 번아웃 증후군의 증상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허성태 원장은 “번아웃 증후군이 아직 질병으로 분류되지는 않았지만 가정과 직장, 사회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적절한 치료나 예방이 필요하다”며 “특히 번아웃 증후군을 음주로 해결할 경우 알코올 의존증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으므로 평소 음주량이나 횟수를 미리 체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도움말=보건복지부 지정 알코올 질환 전문 다사랑중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허성태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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